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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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4/12/31
Pages/Weight/Size 135*195*20mm
ISBN 9791198375339
Categories 소설/시/희곡 > 고전문학
Description
나, 마흔아홉인 레아는 스물다섯 셰리를 사랑한다. 얼마 후면 결혼할 남자인 그를.

여자의 애칭은 누누(유모)이고, 남자의 애칭은 셰리(소중한 아이)다. 누누인 레아는 쉰 살을 코앞에 둔 사교계 여인이고, 그녀보다 반세기 어린 셰리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다. 레아는 같은 사교계 여인인 셰리의 모친과 절친하고, 셰리를 어릴 때부터 보아왔다. 6년 전 어느 밤, 레아와 셰리는 단둘이 있게 되고 키스를 한다. 레아는 처음엔 미처 깨닫지 못했고 다음 순간엔 부인하지만 설렘을 느낀다.

‘알고 싶었던 걸 확인한’ 셰리는 확연해진 상호 간의 감정이 두려워 위악을 떤다. 위악에 자극 받고, 방금 깨달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 레아는 다시 키스한다. 셰리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무너진다. 그가 어릴 때 레아를 일컫던 호칭인 ‘누누’가 이제는 ‘그가 쾌락 한가운데서 마치 구조 요청처럼 그녀에게 던지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레아와 셰리의 모친은 셰리를 동년배의 젊은 여성과 결혼시키고 두 사람은 짐짓 가볍게 이별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고통스럽고,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함께 고통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날 자정, 셰리는 불쑥 레아의 방에 들어선다.
Contents
책 머리에
셰리
옮긴이의 말
Author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장소미
프랑스의 작가, 마임배우, 무용수, 저널리스트.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독보적인 프랑스 작가. 프랑스 역사상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최초의 여성. 20대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클로딘 연작 4편을 썼고(거의 감금된 상황에서) 남편의 필명으로 출간되었다. 1년에 1편씩 썼으니 엄청난 생산성에 가혹한 노동 착취라 할 만하다. 이 클로딘 연작은 당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세기 최초의 사춘기 소녀'가 탄생한 것이다. 일상의 경험, 내밀한 감정, 사적 관계를 탐구하는 유연하고 서술적인 산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문학적 경향, 내면의 복잡성을 포착하고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을 조사하려는 당시의 문학적 경향에 딱 들어맞았다.

콜레트는 일곱 살에 발자크를 비롯해 코르네이유 등 프랑스의 고전을 탐독한다. 전직 군인이자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세금 징수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어와 글쓰기 수업을 받았다. 부모의 따듯한 사랑 속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특히 집 안뜰의 정원에서 관찰 기술을 터득한다. 부르고뉴의 숲과 정원, 그 향수는 평생 콜레트 글쓰기의 근원에 자리 잡았다. 남편 윌리(Willy)는 당대의 영향력 있는 음악 평론가이자 작가, 그리고 출판 업자였다. 그는 젊은 아내를 파리의 문학계와 음악계에 소개했는데, 그곳에서 가브리엘은 부르고뉴의 거친 악센트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젊은 아내의 글쓰기 능력에 놀란 Willy는 그녀를 쉐도우 대필작가로 이용한다. 클로딘 시리즈는 당시 문화현상이 될 정도였다. 클로딘의 단발머리가 도처에서 튀어나와 파리를 휘젓고 다녔다. 1906년 자신의 글에 관한 그 어떤 권리도 얻지 못한 채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 후 콜레트는 뮤직홀에서 당대 최초의 여성 마임 배우가 된다. 그녀의 의상, 그리고 동료 여배우와의 키스 등으로 쇼는 경찰로부터 공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1906년 윌리와 헤어진 후에 쓰기 시작한 글들이 바로 출간을 앞둔 「les vrilles de la vigne 포도덩굴손」이다. 스무 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 어린 시절의 정원과 숲의 기억, 그리고 당시의 파트너인 마틸드 드 모니(미시)와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이 시기 콜레트는 작가로서의 직업적인 성취도 이루기 시작한다.

1912년 콜레트는 정치인이자 언론인인 Henry de Jouvenel을 만나 결혼한다. 외동딸 Colette Renee de Jouvenel을 두었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40세의 나이에도 당시 16세였던 남편의 아들 베르트랑 드 주브넬 (Bertrand de Jouvenel)과 5년 동안 연인관계로 지낸다. 이때의 이야기가 1920년 소설 '셰리'로 출간된다. 소설은 베르트랑 드 주브넬과 관계를 맺기 몇 년 전인 1912년에 구상했다고 해서 환상이 현실이 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두 번째 남편과는 1923년에 이혼) 1910년대 후반엔 신문의 평론 기고와 연극 각색에도 참여하고 Maurice Ravel과 음악 작업도 함께하면서 배우, 작가, 가수이자 작곡가로 벨 에포크의 유명 인사가 된다.

1929년엔 대공황 속에서 생계를 위해서 파리의 rue de Miromesnil 에 '미용 연구소' 일종의 뷰티샵을 열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향수와 화장품을 만들고 여성들의 피부관리를 직접 해주기도 했다. 물론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그 해 콜레트는 자신보다 16살 적은 나이의 세 번째 남편인 Maurice Goudeket을 만나 결혼한다. 전쟁 중에는 남편 모리스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자 비시 정부의 유력 인사들을 비롯해 각계의 인물들을 동원해서 남편을 수용소에서 구출해낸다.

고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그녀는 주로 침대에서 수많은 신문에 글을 쓰고 소설을 출판한다. 그녀의 비정치적 성향과 재정적 필요로 인해 독일 점령기의 협력주의 신문, 페탱주의 신문에도 글을 썼고 지하 언론의 저항 세력으로부터는 거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점령을 옹호하거나 찬양하는 글은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점령기의 일상, 전시의 여성들의 삶의 고단한 풍경을 써나갔을 뿐이다.

1945년엔 만장일치로 공쿠르 아카데미에 선출되었고 1949년에는 공쿠르 아카데미의 회장이 된다. 명성을 얻으려면 자신의 이미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빨리 이해한 그녀는 20세기에 가장 많은 사진이 찍힌 작가로 남는다. 1954년 8월 3일 사망 후 가톨릭교회의 장례식은 거부당했지만, 프랑스는 여성 사상 최초로 국가 장례로 콜레트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페르라세즈 묘지에 안장했다.
프랑스의 작가, 마임배우, 무용수, 저널리스트.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독보적인 프랑스 작가. 프랑스 역사상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최초의 여성. 20대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클로딘 연작 4편을 썼고(거의 감금된 상황에서) 남편의 필명으로 출간되었다. 1년에 1편씩 썼으니 엄청난 생산성에 가혹한 노동 착취라 할 만하다. 이 클로딘 연작은 당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세기 최초의 사춘기 소녀'가 탄생한 것이다. 일상의 경험, 내밀한 감정, 사적 관계를 탐구하는 유연하고 서술적인 산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문학적 경향, 내면의 복잡성을 포착하고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을 조사하려는 당시의 문학적 경향에 딱 들어맞았다.

콜레트는 일곱 살에 발자크를 비롯해 코르네이유 등 프랑스의 고전을 탐독한다. 전직 군인이자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세금 징수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어와 글쓰기 수업을 받았다. 부모의 따듯한 사랑 속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특히 집 안뜰의 정원에서 관찰 기술을 터득한다. 부르고뉴의 숲과 정원, 그 향수는 평생 콜레트 글쓰기의 근원에 자리 잡았다. 남편 윌리(Willy)는 당대의 영향력 있는 음악 평론가이자 작가, 그리고 출판 업자였다. 그는 젊은 아내를 파리의 문학계와 음악계에 소개했는데, 그곳에서 가브리엘은 부르고뉴의 거친 악센트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젊은 아내의 글쓰기 능력에 놀란 Willy는 그녀를 쉐도우 대필작가로 이용한다. 클로딘 시리즈는 당시 문화현상이 될 정도였다. 클로딘의 단발머리가 도처에서 튀어나와 파리를 휘젓고 다녔다. 1906년 자신의 글에 관한 그 어떤 권리도 얻지 못한 채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 후 콜레트는 뮤직홀에서 당대 최초의 여성 마임 배우가 된다. 그녀의 의상, 그리고 동료 여배우와의 키스 등으로 쇼는 경찰로부터 공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1906년 윌리와 헤어진 후에 쓰기 시작한 글들이 바로 출간을 앞둔 「les vrilles de la vigne 포도덩굴손」이다. 스무 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 어린 시절의 정원과 숲의 기억, 그리고 당시의 파트너인 마틸드 드 모니(미시)와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이 시기 콜레트는 작가로서의 직업적인 성취도 이루기 시작한다.

1912년 콜레트는 정치인이자 언론인인 Henry de Jouvenel을 만나 결혼한다. 외동딸 Colette Renee de Jouvenel을 두었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40세의 나이에도 당시 16세였던 남편의 아들 베르트랑 드 주브넬 (Bertrand de Jouvenel)과 5년 동안 연인관계로 지낸다. 이때의 이야기가 1920년 소설 '셰리'로 출간된다. 소설은 베르트랑 드 주브넬과 관계를 맺기 몇 년 전인 1912년에 구상했다고 해서 환상이 현실이 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두 번째 남편과는 1923년에 이혼) 1910년대 후반엔 신문의 평론 기고와 연극 각색에도 참여하고 Maurice Ravel과 음악 작업도 함께하면서 배우, 작가, 가수이자 작곡가로 벨 에포크의 유명 인사가 된다.

1929년엔 대공황 속에서 생계를 위해서 파리의 rue de Miromesnil 에 '미용 연구소' 일종의 뷰티샵을 열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향수와 화장품을 만들고 여성들의 피부관리를 직접 해주기도 했다. 물론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그 해 콜레트는 자신보다 16살 적은 나이의 세 번째 남편인 Maurice Goudeket을 만나 결혼한다. 전쟁 중에는 남편 모리스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자 비시 정부의 유력 인사들을 비롯해 각계의 인물들을 동원해서 남편을 수용소에서 구출해낸다.

고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그녀는 주로 침대에서 수많은 신문에 글을 쓰고 소설을 출판한다. 그녀의 비정치적 성향과 재정적 필요로 인해 독일 점령기의 협력주의 신문, 페탱주의 신문에도 글을 썼고 지하 언론의 저항 세력으로부터는 거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점령을 옹호하거나 찬양하는 글은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점령기의 일상, 전시의 여성들의 삶의 고단한 풍경을 써나갔을 뿐이다.

1945년엔 만장일치로 공쿠르 아카데미에 선출되었고 1949년에는 공쿠르 아카데미의 회장이 된다. 명성을 얻으려면 자신의 이미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빨리 이해한 그녀는 20세기에 가장 많은 사진이 찍힌 작가로 남는다. 1954년 8월 3일 사망 후 가톨릭교회의 장례식은 거부당했지만, 프랑스는 여성 사상 최초로 국가 장례로 콜레트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페르라세즈 묘지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