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20세기 초 바르샤바의 유대인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나치즘, 사회주의, 시온주의 등 온갖 위협과 이념이 떠도는 바르샤바에서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는 작가로 살아간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한 채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아론 그라이딩거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온다. 바르샤바를 방문한 미국 백만장자 샘 드라이만으로부터 희곡 청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상상도 못한 액수의 선불금을 받게 되고, 그와 더불어 일련의 성적 모험을 겪는다. 그 상대는 공산주의자 애인, 여배우, 하녀, 친구의 아내 등으로 다양하다. 어느 날 아론은 우연히 자신이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유년시절의 친구 쇼샤를 만난다. 쇼샤는 몸도 정신도 미성숙한, 소녀 같은 여자다. 그간 죽은 줄만 알았던 쇼샤를 재회한 아론은 지금껏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찾아왔는지 한순간에 깨닫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순수, 바로 쇼샤이다.
작가 싱어는 반유대주의와 나치즘의 공포가 시시각각 바르샤바를 덮쳐오는 절체절명의 시기를 낭만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의 입을 빌려 인간, 종교, 역사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묵직하게 담아낸다. 죽음에 무심한 듯 말하는 이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죽음의 위험이 상존한 공간에서야말로 인간은 삶을 또렷이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치의 존재는 많은 이를 공포에 떨게 했지만, 이들로부터 사랑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삶을 바치는 인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쇼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싱어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그 까닭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Author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정영문
1904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 랍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바르샤바 랍비 신학교에서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을 받았으나 랍비보다는 작가가 되길 원했다. “유대인의 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 인류의 보편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문학”이라는 평을 받으며 197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67년 『염소 즐라테』로 뉴베리 아너상을 수상한 뒤 바로 이듬해인 1968년, 1969년에도 『무시무시한 여인숙』, 『바르샤바로 간 슐레밀』로 뉴베리 아너상을 수상했다. 1970년엔 아동 문학 부분에서 『기쁨의 날: 바르샤바에서 자란 소년의 이야기』로, 1974년엔 『깃털의 왕관과 다른 이야기』로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내셔널 북 어워드를 두 차례 수상했다.
싱어는 랍비의 아들로서 모든 유대 기도문과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며 토라와 탈무드를 배웠지만 관습에는 그다지 얽매이지 않았다. 정통 유대교 출신인 걸 자각하면서도 그는 회의론자로 남았다. 유대교의 신을 믿었으나 모든 종류의 유대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한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홀로코스트와 세계대전으로 인해 친구와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싱어는 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 형제들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하느님께 화가 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결국 마음의 고향은 유대인 공동체였다. 그는 영어, 히브리어, 폴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이디시어를 자신의 첫 번째 언어로 삼았으며, 미국 이주 후에도 유대인 공동체와의 접점을 계속 이어갔다. 1991년 사망한 그는 전통적인 유대 장례 절차에 따라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힌다.
1904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 랍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바르샤바 랍비 신학교에서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을 받았으나 랍비보다는 작가가 되길 원했다. “유대인의 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 인류의 보편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문학”이라는 평을 받으며 197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67년 『염소 즐라테』로 뉴베리 아너상을 수상한 뒤 바로 이듬해인 1968년, 1969년에도 『무시무시한 여인숙』, 『바르샤바로 간 슐레밀』로 뉴베리 아너상을 수상했다. 1970년엔 아동 문학 부분에서 『기쁨의 날: 바르샤바에서 자란 소년의 이야기』로, 1974년엔 『깃털의 왕관과 다른 이야기』로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내셔널 북 어워드를 두 차례 수상했다.
싱어는 랍비의 아들로서 모든 유대 기도문과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며 토라와 탈무드를 배웠지만 관습에는 그다지 얽매이지 않았다. 정통 유대교 출신인 걸 자각하면서도 그는 회의론자로 남았다. 유대교의 신을 믿었으나 모든 종류의 유대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한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홀로코스트와 세계대전으로 인해 친구와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싱어는 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 형제들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하느님께 화가 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결국 마음의 고향은 유대인 공동체였다. 그는 영어, 히브리어, 폴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이디시어를 자신의 첫 번째 언어로 삼았으며, 미국 이주 후에도 유대인 공동체와의 접점을 계속 이어갔다. 1991년 사망한 그는 전통적인 유대 장례 절차에 따라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