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의 말》(이다북스 간)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감독 겸 배우인 나운규가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신문과 잡지에 게재한 글과 대담을 모았다. 안타깝게도 조선 영화의 상징이었고 한국 영화의 혼불이 된 나운규가 관여한 작품들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과 말로나마 그의 영화정신을 만난다. 그가 쓴 글과 대담에서 ‘나운규시대’를 읽는다. 당시 시대적 염원, 영화계의 현실, 영화인을 바라보는 시선,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몸을 바친 이들과 마주한다.
숱한 검열 속에서도 자기만의 세계를 일군 한 영화인의 영화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읽으며,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는지 헤아린다. 그로써 우리 안의 영화에서 세계의 영화로 뻗어 나가는 한국 영화의 뿌리와 바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Contents
들어가는 글
1장__내게는 조선 영화가 전부다
나의 러시아 방랑기
〈철인도〉 평을 읽고
현실을 망각한 영화 평자들에게 답함
신변산화
〈아리랑〉과 사회와 나
2장__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은 영화뿐이다
‘개화당’의 영화화
〈개화당〉의 제작자로서
부활한 신일선을 보고, 극계와 영화계의 이 일 저 일까지
감독으로서 만들고 싶은 영화
조선 영화인의 투지와 경제
채플린과 그 예술을 보고자
3장__다시 태어나도 영화를 하련다
당대 인기 스타, 나운규 씨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명배우, 명감독이 모여 ‘조선 영화’를 말함
조선 영화감독 고심담
명배우 나운규 씨,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
영화 시감
(부록) 소설로 보는 〈아리랑〉
Author
나운규,조일동
1902년 두만강 강변의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남. 회령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군 비밀조직에 가담해 2년간 옥살이를 하였으며, 감옥에서 춘사라는 호를 얻음. 1924년 23세 때 영화계의 문을 노크해 1925년 〈운영전〉을 통해 배우로 데뷔. 1926년 극본, 연출, 주연을 도맡은 영화 〈아리랑〉으로 일약 한국 영화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그 후 십 년간의 나운규 시대, 우리 무성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음. 보잘것없는 장비로 일껏 찍어놓으면 뭉텅이 가위질을 당하는 게 일과였던 식민지 영화인의 비애와 채울 수 없는 예술혼에 대한 고뇌로 마지막 영화 〈오몽녀〉를 찍을 때는 객혈과 졸도에 이를 만큼 육신이 망가져 끝내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02년 두만강 강변의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남. 회령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군 비밀조직에 가담해 2년간 옥살이를 하였으며, 감옥에서 춘사라는 호를 얻음. 1924년 23세 때 영화계의 문을 노크해 1925년 〈운영전〉을 통해 배우로 데뷔. 1926년 극본, 연출, 주연을 도맡은 영화 〈아리랑〉으로 일약 한국 영화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그 후 십 년간의 나운규 시대, 우리 무성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음. 보잘것없는 장비로 일껏 찍어놓으면 뭉텅이 가위질을 당하는 게 일과였던 식민지 영화인의 비애와 채울 수 없는 예술혼에 대한 고뇌로 마지막 영화 〈오몽녀〉를 찍을 때는 객혈과 졸도에 이를 만큼 육신이 망가져 끝내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