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한 정사각형의 디자인, 중앙의 금색 장식 등 1922년에 출시된 코코 샤넬의 No. 5는 향수계에 혁명이었다. 한 세기를 주름잡았던 이 향수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도 전시되었고 우리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샤넬이 어떻게 향기를 찾아 냈는지에 관한 것이다.
카를 슐뢰겔은 서방을 대표하는 향수인 샤넬 넘버 파이브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향수 레드 모스크바의 기원이 하나의 향수에서 출발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할 때 백화점이나 외교관 공간 그리고 국경을 넘어설 때마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는 슐뢰겔의 후각에 하나의 기억을 자리잡게 만들었다. 마침내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후, 파리에 도착해서야 그 향기의 진원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국적을 불문하고 잘 차려 입은 여인들의 주변을 감도는 향기였던 것이다. 소련을 비롯해서 폴란드나 체코 같은 동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던 향수가 바로 레드 모스크바였고 샤넬의 넘버 파이브는 서유럽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향수였다.
이 두 향수는 황후(카테리나 II)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라는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향기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기념일을 위해 1913년 모스크바의 랄레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모든 것이 바뀐다. 이 랄레의 조향사 중 한 사람인 프랑스 출신의 오귀스트 미셸은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향수 공장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새로운 레시피를 실험해서 제국의 향기를 창조했다. 한편 그의 동료였던 에르네스트 보는 혁명으로 들끓던 모스크바를 떠나서 파리로 돌아와 샤넬의 향수를 개발한다. 샤넬은 여러 개의 샘플 중에서 다섯 번째 샘플을 골랐고 이 향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NO.5’가 된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코코 샤넬을 드라마의 한 축으로 그리고 러시아의 젬추지나 몰로토바를 또다른 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샤넬의 삶을 통해서 그녀의 향수가 어떤 방식으로 20세기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젬추지나의 인생을 따라 소비에트 향수산업의 흥망성쇠를 노래한다.
약 240페이지의 이 책은 한 방울의 향수를 통해 20세기 정치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서로 다른 사회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후각이라는 감각의 세계에 열려있는 놀랍도록 다채로운 파노라마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결국 제국의 향기는 샤넬의 넘버 파이브와 젬추지나의 레드 모스크바로 환원되었다.
Contents
한국어판 서문 9
계획에 없던 연구 13
제국의 향기 혹은 1913년 ‘황후 카타리나 2세가 애용하던 향수’
러시아혁명 이후 ‘샤넬 넘버 파이브’와 소련의 향수 ‘레드 모스크바’로 이어진 경위 18
냄새의 풍경: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역사 기록 41
‘제국주의 사슬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질’ 때(레닌):
향수의 세계와 후각 혁명 55
벨 에포크와의 작별과 새로운 여성을 위한 의상:
샤넬과 라마노바의 이중혁명 83
샤넬의 러시아 커넥션 102
모스크바의 프랑스 커넥션?
‘노동자들의 조국’과 미하일 불가코프의 흔적 115
오귀스트 미셸의 미완성 프로젝트:
소비에트 향수 궁전 124
권력의 유혹적인 냄새:
코코 샤넬과 폴리나 젬추지나·몰로토바 20세기 두 명의 커리어 우먼 139
다른 세계에서:
시체 소각장의 연기와 콜리마의 냄새 178
전쟁이 끝난 후: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새로운 유행 스타일과 ‘스틸야기’ 187
추가 기록:
독일 영화의 위대한 여성 올가 체코바,
화장품과 영원한 청춘에 대한 꿈 201
나의 세계가 냄새를 맡는 방법 212
‘검은 사각형뿐만 아니다’:
말레비치의 향수병 218
참고 문헌 226
옮긴이 후기 235
저자 소개 238
옮긴이 소개 240
Author
카를 슐뢰겔,편영수
1948년 독일 바이에른주 하방엔에서 태어난 카를 슐뢰겔은 러시아 근대와 스탈린주의의 역사, 러시아 디아스포라와 반체제 운동, 동유럽 도시들의 문화사, 역사적 내레이션의 이론적 문제들에 연구의 중점을 둔 독일 동유럽 역사가이며 저널리스트이다. 1969년 초에 베를린 자유 대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동유럽 역사와 슬라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공을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슐뢰겔은 살아 있는 동시대 사람들을 객관적인 역사 서술의 방해물이 아니라 본질적인 조건으로 이해한다. 동시대 사람들을 통해서 연구 대상은 비로소 구성된다. 술뢰겔의 주제는 연구의 논리보다는 삶의 역사에서 겪은 경험에서 유래한다.
난민 운동과 디아스포라, 테러와 이데올로기, 지식인층과 시민사회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연구는 전후 시대의 난민들과 이민자들 그리고 동유럽 반체제 인사들과의 직접적인 만남, 또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수행된다. 이것이 슐뢰겔이 소위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종되는 역사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정치 이전의 실질적이며 일상적인 문화 형태를 분석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 이유이다.
1948년 독일 바이에른주 하방엔에서 태어난 카를 슐뢰겔은 러시아 근대와 스탈린주의의 역사, 러시아 디아스포라와 반체제 운동, 동유럽 도시들의 문화사, 역사적 내레이션의 이론적 문제들에 연구의 중점을 둔 독일 동유럽 역사가이며 저널리스트이다. 1969년 초에 베를린 자유 대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동유럽 역사와 슬라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공을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슐뢰겔은 살아 있는 동시대 사람들을 객관적인 역사 서술의 방해물이 아니라 본질적인 조건으로 이해한다. 동시대 사람들을 통해서 연구 대상은 비로소 구성된다. 술뢰겔의 주제는 연구의 논리보다는 삶의 역사에서 겪은 경험에서 유래한다.
난민 운동과 디아스포라, 테러와 이데올로기, 지식인층과 시민사회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연구는 전후 시대의 난민들과 이민자들 그리고 동유럽 반체제 인사들과의 직접적인 만남, 또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수행된다. 이것이 슐뢰겔이 소위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종되는 역사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정치 이전의 실질적이며 일상적인 문화 형태를 분석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