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소옹素翁으로 공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지낸 문신이다. 부친은 증판서 조양정, 어머니는 한응성의 딸이다. 형은 조유한이며 동생은 조찬한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의 진중에 종군하여 활동하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정유재란 무렵 모친상 중에 부인의 상을 당했다. 1601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주부, 감찰 등을 지냈다. 1613년 대북파가 일으킨 계축옥사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1618년 2월에 가솔들을 이끌고 남원으로 옮겨 왔고, 4월에 동생 조찬한과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성균관 사성으로 재등용되었고, 1624년 이괄의 난을 토벌하여 서울을 지켰다. 정묘, 병자호란 때도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항전하였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등용되어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공조참판에 이르렀으며,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조위한의 저서로는 문집 《현곡집玄谷集》과 가사 <유민탄流民嘆>, 한문소설 <최척전崔陟傳> 등이 있다.
본관은 한양,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소옹素翁으로 공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지낸 문신이다. 부친은 증판서 조양정, 어머니는 한응성의 딸이다. 형은 조유한이며 동생은 조찬한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의 진중에 종군하여 활동하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정유재란 무렵 모친상 중에 부인의 상을 당했다. 1601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주부, 감찰 등을 지냈다. 1613년 대북파가 일으킨 계축옥사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1618년 2월에 가솔들을 이끌고 남원으로 옮겨 왔고, 4월에 동생 조찬한과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성균관 사성으로 재등용되었고, 1624년 이괄의 난을 토벌하여 서울을 지켰다. 정묘, 병자호란 때도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항전하였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등용되어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공조참판에 이르렀으며,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조위한의 저서로는 문집 《현곡집玄谷集》과 가사 <유민탄流民嘆>, 한문소설 <최척전崔陟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