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오랜 세월 동안 주변 강대국의 영향과 압력 속에서도 독자성을 유지하며 발전해 온 요인, 그리고 미래에도 한국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할 동력을 한국 문화에서 찾으려 한다면, 다양성을 수용하고 소화해 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그 시대의 당면 과제들을 해결해 온 그 경험과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 문화는 단지 고유한 문화를 중심으로 외래의 것들을 주변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유하든 고유하지 않든 그동안 축적된 문화적 자산 위에 그 시대에 필요한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자산으로 활용하며 발전해 왔다. 그 시대의 당면 현실을 직시하며 과제를 설정하고, 그 과제의 해결을 위해 이용 가능한 선진문화를 최대한 수용하여 대안을 모색해 왔으며, 그 성과들이 한국 문화를 형성해 왔고, 그러한 문화 형성의 방식 역시 한국 문화의 주요한 특성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선진문화의 생산지이자 유통로였던 중국을 통해 외래문화를 수입해야 했고, 그 타성에 젖어서 바닷길로 들어오는 새로운 선진문화를 외면했을 때 한반도는 존망의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가 지금처럼 격렬하게 맞부딪치는 강대국들의 전선 한복판에 놓이게 된 것은 반만년 한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시대적으로는 동양의 전통 문화와 서구의 근대 문화, 이념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사회주의, 문명사적으로는 동아시아 유교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이 병존하는 한반도는 그것들을 다 끌어안고 시대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지속하기 어려운 운명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는 이 갈등과 충돌의 경계에서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을 견뎌야 할 것이고, 우리는 한국 문화가 축적해 온 경험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현재 한반도에 드러난 이러한 갈등의 문화적 현상들은 한반도 역사에서 축적된 문화에 비추어 보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러한 갈등과 대립 속에서 조화와 협력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한국 문화의 전통이다. 그와 같은 대립적 문화들을 활용하여 대안을 찾고 미래를 열어 가는 것이 한국 문화의 동력이며, 그것이 바로 현재의 한국을 만들어 온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인 한반도의 절박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한국 문화의 특성은 전 세계가 상호 소통하는 이 시대에 더 빛을 발할 것이다.
Contents
책머리에
김형찬,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다시 논함」
1부 한국 문화 전통의 재인식
김형찬 한국철학의 정체성과 한국철학사의 관점
박종천 풍류(風流)로 보는 한국종교의 에토스
김종만, 김은기 한국인의 가치관과 문화적 정체성 -무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최종석 고려후기 ‘전형적’ 제후국 외교의례의 창출과 몽골 임팩트 -'전형적인' 조공 책봉 관계의 이해 심화를 겸하여
박경남 유가 성리학적 이념의 구현과 체현으로서의 문학과 -조선 시대 문학관의 변화와 한국문학의 정체성(1)
최종석 조선 초기 종교 심성의 전환과 신사(神事) 혁신 -‘전통적’ 종교 심성의 탄생에 관한 탐색
박경남 기질(氣質)과 기상(氣像)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문학관 -조선시대 문학관의 변화와 한국문학의 정체성(2)
박종천 가족종교의 관점에서 보는 한국종교문화
2부 20세기 한국 문화의 재구성
정혜린 자연과 문화의 관계에서 본 ‘한국 미술’
황두진 밀도전략(密度戰略) -변화하는 시대, 한국건축의 정체성
정혜린 구수한 큰 맛 -번역된 자연미
고지혜 1950년대 ‘신라’의 재전유와 네이션의 서사 만들기 -김동리의 신라 연작을 중심으로
황두진 동적 기능주의, 한옥의 영감
고지혜 1960~1970년대 이상론(李箱論)의 향방
정병욱 한국 근대와 학력주의
김은기, 대니얼 코널리 한국의 시민종교와 국가정체성
정병욱 한국인은 무엇을 기념하는가? -근현대 역사박물관의 주제 분석
Author
김형찬
1963년 생으로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및 철학과를 졸업했다. 지곡서당(芝谷書堂, 태동고전연구소) 한문연수과정을 수료 하였고, 고려대 철학박사(동양철학 전공), 동아일보 학술전문기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다. 저서로는 『오래된 꿈』, 『조선유학의 자연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공저)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理氣論의 일원론화 연구」, 「氣철학에서의 총체적 통찰과 경험적 인식」, 「전도된 형이상학과 경험세계의 파편들, 그리고 深淵」 등 다수가 있다.
1963년 생으로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및 철학과를 졸업했다. 지곡서당(芝谷書堂, 태동고전연구소) 한문연수과정을 수료 하였고, 고려대 철학박사(동양철학 전공), 동아일보 학술전문기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다. 저서로는 『오래된 꿈』, 『조선유학의 자연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공저)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理氣論의 일원론화 연구」, 「氣철학에서의 총체적 통찰과 경험적 인식」, 「전도된 형이상학과 경험세계의 파편들, 그리고 深淵」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