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라는 서물은 겨우 1,753자로 야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동물을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완벽한 수신 이론서로서 불후의 고전이다.
그런데 800여 년 전에 송나라의 주희가 엉뚱하게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는 서물을 토막 치듯 멋대로 잘라 내 고치고, 빼고 하물며 134자를 날조해서 끼워 넣기까지 하며 뒤죽박죽 꿰맞추다 보니 『대학장구』라는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 황당한 인간관 위에서 제대로 해석이 안 된다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8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주희의 괴물 같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그 뒤를 졸졸 따르는 후학들이 아직도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산업화를 이룩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윤리도덕을 거의 무용지물로 여겨 내팽개쳐 버리고, 완벽한 집행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법 만능주의에 빠져 무법천지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디라 할 것 없이 도시의 뒷골목은 범죄 소굴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공동체 사회를 해체하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 짐승처럼 살려는 듯 보인다. 적어도 인간이 공동체 사회를 해체하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 짐승들처럼 ‘힘의 논리’에 따라 살지 않으려면, 마지막으로 최고의 수신서인 『대학』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 가능할 일이다.
그러나 『대학』은 아직도 모호한 개념투성이의 거친 원석 그대로인 셈이다. 결국 우리가 이 보석 같은 『대학』을 다이아몬드 세공하듯 정성껏 다듬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용』이라는 서물은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 가운데서도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품격 높은 경전이다. 그렇다고 난해한 철학 이야기도 아니고, 난삽한 형이상학을 논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인간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 공동체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행동규범을 주제로 하는 수신 이론서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용』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주희의 『중용장구』를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후학들도 당연히 『중용장구』를 거의 그대로 따를 뿐이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점은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못한 부실한 인간관위에서 모든 것을 사유하고 유추하므로 이 서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제는 굳게 씌워졌던 『중용장구』의 굴레를 벗어나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의 바탕 위에서 실체에 부합하는 인간관을 확립하고 그것을 딛고 서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