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본(徐有本, 1762~1822)은 본관이 대구(大丘), 자(字)는 혼원(混原), 호(號)는 좌소산인(左蘇山人)이다. 좌소산(左蘇山)은 대구 서씨 세거지(世居地)가 있는 경기도 장단(長湍) 백악산(白岳山)의 다른 이름이다. 서유본 가문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명문가이다. 조부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와 대제학(大提學)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고,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보만재사집(保晩齋四集)》 등 거질의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또한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은 정조(正祖)를 옹립한 공이 있어서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부친 학산(鶴山)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호조판서와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을 지냈고 《규장총목(奎章總目)》을 편찬하였으며, 중부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 1749~1824)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힌 뒤 정조의 어명찬(御命撰) 경학류(經學類) 서적(書籍)을 편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향촌에 거주하는 사대부의 이상적인 삶에 관해 서술한 거질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 1764~1845)는 그의 친동생이고, 여성을 위한 가정생활 총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를 편찬한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그의 부인이다.
서유본은 서유구와 함께 조부 서명응과 중부 서형수에게 경학과 문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탄소(彈素) 유금(柳琴, 1741~1788)을 숙사(塾師)로 두고 《사기(史記)》를 배웠다. 서유본은 젊어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여 관각체(館閣體)에 매우 뛰어나, 조부 서명응이나 부친 서호수가 관각(館閣)에 응제(應製)할 것이 있으면 그에게 초고 작성을 부탁했다고 한다. 현재 문집에는 서명응과 서호수뿐 아니라 동생 서유구를 위해 대신 지은 응제 작품들이 여럿 실려있다. 서유본은 18세에 상시(庠試),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서 변려문(騈儷文)을 익히는 데 더욱 힘썼으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44세인 1805년에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나, 1806년에 중부 서형수가 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면서 서유본도 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서유본은 이후 삼호(三湖, 지금의 마포)의 행정(杏亭)에 교거(僑居)하며 경전을 연구하고 책을 저술하며 세월을 보냈다.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은 본관이 대구(大丘), 자(字)는 혼원(混原), 호(號)는 좌소산인(左蘇山人)이다. 좌소산(左蘇山)은 대구 서씨 세거지(世居地)가 있는 경기도 장단(長湍) 백악산(白岳山)의 다른 이름이다. 서유본 가문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명문가이다. 조부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와 대제학(大提學)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고,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보만재사집(保晩齋四集)》 등 거질의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또한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은 정조(正祖)를 옹립한 공이 있어서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부친 학산(鶴山)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호조판서와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을 지냈고 《규장총목(奎章總目)》을 편찬하였으며, 중부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 1749~1824)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힌 뒤 정조의 어명찬(御命撰) 경학류(經學類) 서적(書籍)을 편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향촌에 거주하는 사대부의 이상적인 삶에 관해 서술한 거질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 1764~1845)는 그의 친동생이고, 여성을 위한 가정생활 총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를 편찬한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그의 부인이다.
서유본은 서유구와 함께 조부 서명응과 중부 서형수에게 경학과 문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탄소(彈素) 유금(柳琴, 1741~1788)을 숙사(塾師)로 두고 《사기(史記)》를 배웠다. 서유본은 젊어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여 관각체(館閣體)에 매우 뛰어나, 조부 서명응이나 부친 서호수가 관각(館閣)에 응제(應製)할 것이 있으면 그에게 초고 작성을 부탁했다고 한다. 현재 문집에는 서명응과 서호수뿐 아니라 동생 서유구를 위해 대신 지은 응제 작품들이 여럿 실려있다. 서유본은 18세에 상시(庠試),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서 변려문(騈儷文)을 익히는 데 더욱 힘썼으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44세인 1805년에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나, 1806년에 중부 서형수가 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면서 서유본도 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서유본은 이후 삼호(三湖, 지금의 마포)의 행정(杏亭)에 교거(僑居)하며 경전을 연구하고 책을 저술하며 세월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