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테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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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8/02/20
Pages/Weight/Size 128*190*20mm
ISBN 9791186998595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스페인/중남미소설
Contents
소개의 말 ·7
플라테로와 나 · 11
히메네스의 대표적 명시들 · 217
작품해설 · 231
후안 라몬 히메네스 연보 · 250
시 목록 ·254
Author
후안 라몬 히메네스,염승섭
스페인의 시인. 1881년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모게르(Moguer)에서 출생했으며, 히메네스도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유년시절 그는 친구들과 놀기를 싫어하고 그림과 글쓰기를 중독에 가까울 만큼 좋아하던 병약하고 수줍은 소년이었다. 열네 살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시가 고향의 문학잡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의 강요로 세비야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이 시절에는 시보다 회화 작업에 더 빠져 있었다. 그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회화적 이미지는 이런 배경이 반영된 것이다.

1900년 마드리드로 이주했고, 얼마 후 시집 『슬픈 아리아』를 발표했다. 그 이전에도 잡지에 산발적으로 시를 발표했지만 그에게는 공식적인 첫 시집이었다. 이후 다시 건강 때문에 모게르로 귀향하게 되는데, 귀향한 지 얼마 후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즈음 신경쇠약과 호흡장애 등으로 요양소에 입원, 장기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상징주의 시를 접하게 된다.

1905년부터 1912년까지 고향 모게르에서 홀로 지내던 시기는 그에게 가장 외로웠던 때로, 초기 감상적 톤의 시는 대부분 이때 쓴 것이며, 또 가장 많은 시를 쓴 시기이기도 하다. 『봄의 발라드』, 『소리 나는 고독』, 『엘레지』, 『미로』, 『일요일』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1912년에 건강을 회복한 그는 마드리드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번에는 당시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 기숙사이며 전위주의 예술의 산실이었던 레시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Residencia de Estudiantes)에 거주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몇 년 후배들이었던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등과 교분을 맺으며 그들에게 큰 예술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들은 각각 문학, 회화, 영화의 영역에서 20세기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그로서는 『영적 소네트』와 『여름』 같은 시집이 나온 때로, 같은 유형의 반복적인 시가 나오면서 새로운 미학을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다.

1916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변화가 많았던 한 해였다. 생애 처음으로 미국 여행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세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Zenobia Camprubi Aymar)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아내 이상의 지적 동반자였고, 인도를 비롯한 동양세계에 관심이 높아, 인도 그 타고르의 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히메네스 시에 동양적 범신론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범신론적인 우주관을 자유시 형식에 담아내는 새로운 변화는, 미국 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명시 「풀잎(The leaves of grass)」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1917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온 그는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는 1936년까지 이곳에 거주하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직후에 『갓 결혼한 한 그의 일기』(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년 『한 그의 일기와 바다』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초기 감상적인 시어들이 철학적이고 사념적인 색채를 띠어가며, 『돌과 하늘』, 『완전한 계절』 같은 그의 대표적 작품들이 쏟아졌다. 그의 고유한 목소리가 절정에 이르고 난해하면서도 대중적인 매력을 가진 작품들이 탄생했다.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지식인들, 특히 좌파적 이념과 진보적 사고를 가진 수많은 지식인이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히메네스 역시 고국을 떠나 푸에르토리코와 아바나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카리브 지역을 떠나 미국의 플로리다에 거주하게 된다. 망명 생활을 접고 미국에서의 영구 거주를 결심한 시기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몇 년 후 동부의 워싱턴 DC로 거주지를 옮기고, 듀크 대학과 메릴랜드 대학의 칼리지 파크(College Park) 캠퍼스에서 강의에 전념했다. 그가 강의하던 칼리지 파크 캠퍼스 스페인어문학부 건물은 현재 히메네스 빌딩으로 명명되었고, 로비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일상적 언어를 가진 시와 지극히 관념적인 시를 동시에 썼던 시기로, 『바다 저쪽에는』, 『내면적 동물』, 『욕망받는 신과 욕망하는 신』 그리고 마지막 시집 『떠나가는 강물』이 출판되었다.

1952년 첫 망명지였던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간 그은 간간이 대학에서 강연이나 강의를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1956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지만, 수상의 기쁨도 채 지나기 전에 아내 세노비아가 세상을 떠난다. 아내가 유명을 달리 한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고 마침내 1958년 5월 29일 고국으로 끝내 돌아가지 못한 세상을 떠난다.
스페인의 시인. 1881년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모게르(Moguer)에서 출생했으며, 히메네스도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유년시절 그는 친구들과 놀기를 싫어하고 그림과 글쓰기를 중독에 가까울 만큼 좋아하던 병약하고 수줍은 소년이었다. 열네 살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시가 고향의 문학잡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의 강요로 세비야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이 시절에는 시보다 회화 작업에 더 빠져 있었다. 그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회화적 이미지는 이런 배경이 반영된 것이다.

1900년 마드리드로 이주했고, 얼마 후 시집 『슬픈 아리아』를 발표했다. 그 이전에도 잡지에 산발적으로 시를 발표했지만 그에게는 공식적인 첫 시집이었다. 이후 다시 건강 때문에 모게르로 귀향하게 되는데, 귀향한 지 얼마 후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즈음 신경쇠약과 호흡장애 등으로 요양소에 입원, 장기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상징주의 시를 접하게 된다.

1905년부터 1912년까지 고향 모게르에서 홀로 지내던 시기는 그에게 가장 외로웠던 때로, 초기 감상적 톤의 시는 대부분 이때 쓴 것이며, 또 가장 많은 시를 쓴 시기이기도 하다. 『봄의 발라드』, 『소리 나는 고독』, 『엘레지』, 『미로』, 『일요일』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1912년에 건강을 회복한 그는 마드리드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번에는 당시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 기숙사이며 전위주의 예술의 산실이었던 레시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Residencia de Estudiantes)에 거주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몇 년 후배들이었던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등과 교분을 맺으며 그들에게 큰 예술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들은 각각 문학, 회화, 영화의 영역에서 20세기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그로서는 『영적 소네트』와 『여름』 같은 시집이 나온 때로, 같은 유형의 반복적인 시가 나오면서 새로운 미학을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다.

1916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변화가 많았던 한 해였다. 생애 처음으로 미국 여행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세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Zenobia Camprubi Aymar)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아내 이상의 지적 동반자였고, 인도를 비롯한 동양세계에 관심이 높아, 인도 그 타고르의 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히메네스 시에 동양적 범신론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범신론적인 우주관을 자유시 형식에 담아내는 새로운 변화는, 미국 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명시 「풀잎(The leaves of grass)」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1917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온 그는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는 1936년까지 이곳에 거주하면서 창작활동을 한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직후에 『갓 결혼한 한 그의 일기』(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년 『한 그의 일기와 바다』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초기 감상적인 시어들이 철학적이고 사념적인 색채를 띠어가며, 『돌과 하늘』, 『완전한 계절』 같은 그의 대표적 작품들이 쏟아졌다. 그의 고유한 목소리가 절정에 이르고 난해하면서도 대중적인 매력을 가진 작품들이 탄생했다.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지식인들, 특히 좌파적 이념과 진보적 사고를 가진 수많은 지식인이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히메네스 역시 고국을 떠나 푸에르토리코와 아바나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카리브 지역을 떠나 미국의 플로리다에 거주하게 된다. 망명 생활을 접고 미국에서의 영구 거주를 결심한 시기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몇 년 후 동부의 워싱턴 DC로 거주지를 옮기고, 듀크 대학과 메릴랜드 대학의 칼리지 파크(College Park) 캠퍼스에서 강의에 전념했다. 그가 강의하던 칼리지 파크 캠퍼스 스페인어문학부 건물은 현재 히메네스 빌딩으로 명명되었고, 로비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일상적 언어를 가진 시와 지극히 관념적인 시를 동시에 썼던 시기로, 『바다 저쪽에는』, 『내면적 동물』, 『욕망받는 신과 욕망하는 신』 그리고 마지막 시집 『떠나가는 강물』이 출판되었다.

1952년 첫 망명지였던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간 그은 간간이 대학에서 강연이나 강의를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1956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지만, 수상의 기쁨도 채 지나기 전에 아내 세노비아가 세상을 떠난다. 아내가 유명을 달리 한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고 마침내 1958년 5월 29일 고국으로 끝내 돌아가지 못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