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金瑞坤)와 자혜로운 어머니(奇世德) 사이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건강악화로 모유는 꿈도 꾸지 못했고 워낙 허약하게 태어난 탓에 분유조차 넘기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살기 힘들 것 같으니 포기하라고 했지만 조부모는 매일 쌀을 갈아 입에 머금어 아기에게 먹이는 등 온 정성을 기울여 살려냈다. 아이는 또래들에 비해 몸이 왜소하고 신체적으로도 약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10여 년의 투병생활 끝에 32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죽음을 아이는 철없는 시선으로 지켜봐야 했다.
채울 수 없는 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줄넘기에 집중하여 어린 나이지만 단번에 3,000번 이상을 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이광수, 강원용 목사, 한국단편문학에 심취했다. 백일장을 통해서 크고 작은 수상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이것은 훗날 글을 쓰는 데 큰 용기가 되었다. 한편 청소년 시절에는 자립 의지가 강해서, 아버지 몰래 새벽에 신문을 돌려 학비를 스스로 마련했다. 희망의 페달은 그 시절부터 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재수를 준비하면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일을 했다. 삶의 그늘에 가려진 어둠과 슬픔을 무수히 겪었다.
이후 학업에 대한 끈을 놓을 수 없어서 경기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꿈의 크기를 무한히 넓혀주는 공부와 생활을 위한 거친 노동일을 병행했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졌다. 위암으로 투병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간 헤아리지 못한 가족의 정을 깊이 깨달았다. 아버지의 암 투병은 가족 모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아이는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중에도 초소 가로등을 등불 삼아 영어단어를 외워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민연금관리공단 창단 멤버가 되었다. 큰 포부를 가지고 열심히 일했지만, 일과 조직에 매몰되는 삶에 대한 회의로 7년여 만에 퇴사, 곧 합정동에 음식점을 열었다.
그 무렵 사업은 IMF의 위기 속에서도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 역시 길이 아니다 생각했다, 대신 “양심을 속이지 않겠다.”는 맹세로 직원 2명과 적은 돈으로 대부금융업을 시작했다. 온 정열을 다 바친 회사는 급성장했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왔다. 삶의 절대적인 위기였다. 그야말로 죽음의 경계에서 홀로 서 있었다. 그때, 어린 시절,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며 배를 부여잡고 웃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운명처럼’ 위기의 순간에 웃음을 만나서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한 삶을 찾았다. 나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 웃음은 ‘영혼의 웃음법’이란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지금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기적의 웃음운동인 ‘영혼의 웃음’을 국내외로 설파하고 있다. 현재 저자는 영혼의웃음연구원장으로 새로이 발견한 ‘영혼의 웃음법’을 전 인류에게 보급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金瑞坤)와 자혜로운 어머니(奇世德) 사이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건강악화로 모유는 꿈도 꾸지 못했고 워낙 허약하게 태어난 탓에 분유조차 넘기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살기 힘들 것 같으니 포기하라고 했지만 조부모는 매일 쌀을 갈아 입에 머금어 아기에게 먹이는 등 온 정성을 기울여 살려냈다. 아이는 또래들에 비해 몸이 왜소하고 신체적으로도 약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10여 년의 투병생활 끝에 32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죽음을 아이는 철없는 시선으로 지켜봐야 했다.
채울 수 없는 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줄넘기에 집중하여 어린 나이지만 단번에 3,000번 이상을 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이광수, 강원용 목사, 한국단편문학에 심취했다. 백일장을 통해서 크고 작은 수상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이것은 훗날 글을 쓰는 데 큰 용기가 되었다. 한편 청소년 시절에는 자립 의지가 강해서, 아버지 몰래 새벽에 신문을 돌려 학비를 스스로 마련했다. 희망의 페달은 그 시절부터 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재수를 준비하면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일을 했다. 삶의 그늘에 가려진 어둠과 슬픔을 무수히 겪었다.
이후 학업에 대한 끈을 놓을 수 없어서 경기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꿈의 크기를 무한히 넓혀주는 공부와 생활을 위한 거친 노동일을 병행했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졌다. 위암으로 투병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간 헤아리지 못한 가족의 정을 깊이 깨달았다. 아버지의 암 투병은 가족 모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아이는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중에도 초소 가로등을 등불 삼아 영어단어를 외워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민연금관리공단 창단 멤버가 되었다. 큰 포부를 가지고 열심히 일했지만, 일과 조직에 매몰되는 삶에 대한 회의로 7년여 만에 퇴사, 곧 합정동에 음식점을 열었다.
그 무렵 사업은 IMF의 위기 속에서도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 역시 길이 아니다 생각했다, 대신 “양심을 속이지 않겠다.”는 맹세로 직원 2명과 적은 돈으로 대부금융업을 시작했다. 온 정열을 다 바친 회사는 급성장했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왔다. 삶의 절대적인 위기였다. 그야말로 죽음의 경계에서 홀로 서 있었다. 그때, 어린 시절,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며 배를 부여잡고 웃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운명처럼’ 위기의 순간에 웃음을 만나서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한 삶을 찾았다. 나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 웃음은 ‘영혼의 웃음법’이란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지금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기적의 웃음운동인 ‘영혼의 웃음’을 국내외로 설파하고 있다. 현재 저자는 영혼의웃음연구원장으로 새로이 발견한 ‘영혼의 웃음법’을 전 인류에게 보급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