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는 아티초크가 국내 최초로 출간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이은 윌리엄 해즐릿의 두 번째 인문 에세이집이다. 조지 오웰과 함께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에세이스트로서, 국민 주권 공화국을 열망한 급진적 이상주의자였던 해즐릿은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과 행동을 파고들어 그 빛과 그림자를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 본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단 이번 선집은 부와 지위를 거머쥔 왕립 예술원 회원들과 죽음보다 가난을 두려워하는 대다수 미술가들의 삶을 대비시켜 고찰하고,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폭군은 별로 없는가라는 도발적인 화두를 던지는가 하면, 가장 비열한 노예가 가장 이상적인 아첨꾼인 이유 등 인간 본성과 행동에 관한 해즐릿만의 통찰력과 필력에 빛나는 에세이가 담겨 있다. 시공을 초월한 호소력과 깊은 시의성, 신랄한 필력은 해즐릿이 왜 영국 “최고의 문장가”이자 “열정의 논쟁가”인지를 다시금 확인시켜 줄 것이다.
Contents
윌리엄 해즐릿의 묘비문
미술가의 노년에 관하여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패션에 관하여
성공의 조건에 관하여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
사형에 관하여
옮긴이의 말 런던의 고독 & 리베르 아모리스
연보 윌리엄 해즐릿
Author
윌리엄 해즐릿,공진호
윌리엄 해즐릿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에세이스트였다. 그는 자유사상가이자 이단아였고, 반체제 운동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런 견해를 갖는 것은 위험한 시대였다. 해즐릿은 놀라운 분량의 문학 비평과 인간사에 대한 에세이를 남겼으며 그가 규정한 문학 비평론은 월터 페이터와 토머스 칼라일은 물론 현대의 비평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적극적인 지식인이었던 해즐릿은 문학 비평 이전에 정치와 사회 문제를 보도하고 해설하는 일을 했다. 1778년 영국 메이드스톤에서 급진적인 유니테리언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93년 런던의 해크니 뉴 칼리지에 들어간 해즐릿은 급진적 사상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몇 년 동안 초상화 화가로 경력을 쌓으려 애쓰는 한편 철학서 『인간 행동론』을 발표했다. 1812년 《모닝 크로니컬》의 의회 출입 기자로 일하기 시작해서 약 십 년 만에 에세이스트로서 또 문학과 미술, 연극 비평가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철두철미한 급진적 정견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1820년에 부활한 《런던 매거진》의 ‘스타’ 기고가였다. 이 무렵 자신의 에세이와 문예 비평을 모아 『원탁』(1817)과 『셰익스피어 극의 등장인물론』(1817)을 낸 뒤 이어서 『정치 에세이』(1819), 『좌담』(1821), 『시대정신』(1825)을 출간했다. 해즐릿은 사회에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죽을 때까지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1830년 런던 소호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 해즐릿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에세이스트였다. 그는 자유사상가이자 이단아였고, 반체제 운동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런 견해를 갖는 것은 위험한 시대였다. 해즐릿은 놀라운 분량의 문학 비평과 인간사에 대한 에세이를 남겼으며 그가 규정한 문학 비평론은 월터 페이터와 토머스 칼라일은 물론 현대의 비평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적극적인 지식인이었던 해즐릿은 문학 비평 이전에 정치와 사회 문제를 보도하고 해설하는 일을 했다. 1778년 영국 메이드스톤에서 급진적인 유니테리언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93년 런던의 해크니 뉴 칼리지에 들어간 해즐릿은 급진적 사상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몇 년 동안 초상화 화가로 경력을 쌓으려 애쓰는 한편 철학서 『인간 행동론』을 발표했다. 1812년 《모닝 크로니컬》의 의회 출입 기자로 일하기 시작해서 약 십 년 만에 에세이스트로서 또 문학과 미술, 연극 비평가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철두철미한 급진적 정견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1820년에 부활한 《런던 매거진》의 ‘스타’ 기고가였다. 이 무렵 자신의 에세이와 문예 비평을 모아 『원탁』(1817)과 『셰익스피어 극의 등장인물론』(1817)을 낸 뒤 이어서 『정치 에세이』(1819), 『좌담』(1821), 『시대정신』(1825)을 출간했다. 해즐릿은 사회에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죽을 때까지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1830년 런던 소호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