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 주교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형 집행을 앞둔 안중근 토마스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했던 파리 외방전교회 빌렘 신부가 황해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남긴 친필 사목 서한을 번역한 자료집이다. 안중근과 그 가문의 신앙생활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Contents
간행사 5
추천사 7
일러두기 11
해제 13
한글 번역문 27
프랑스어 판독문 261
부록 449
Author
조제프 빌렘,최용록,신혜림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한국 이름은 홍석구(洪錫九). 1860년 1월 24일 프랑스 로렌(Lorraine)주 모젤(Moselle) 지방의 스피슈렌 (Spicheren)에서 태어났다. 1883년 2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3월 28 일부터 말레이시아 페낭(Penang) 신학교에서 5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한 뒤, 1888년 조선교구로 배속되어 이듬해 2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와 제3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1896년 황해도 지역 전담 사제로 결정됨에 따라 매화동(?花洞) 본당과 청계동(淸溪洞) 본당 초대 주임을 차례로 맡아 성당을 건립하였고, 진남포(鎭南浦)에도 성당부지를 마련하는 등 교 세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청계동에서 세례성사로 인연을 맺은 안중근 토마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포살로 투옥되자, 뮈텔 주교의 불허에도 뤼순(旅順) 형무소를 찾아가 안중근에게 고 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이 때문에 1910년 3월 15일부터 60일간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 았고, 뮈텔 주교와의 불화로 1914년 4월 22일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후 고향 알자 스(Alsace)에서 사목하면서도 한국에 관한 관심과 애정만은 버리지 않았으며, 1919년 베르사유 조 약이 진행될 당시 파리를 방문한 한국 측 대표를 도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 다. 1938년 5월 16일 모젤 지방의 사랄브(Sarralbe) 요양소에서 선종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한국 이름은 홍석구(洪錫九). 1860년 1월 24일 프랑스 로렌(Lorraine)주 모젤(Moselle) 지방의 스피슈렌 (Spicheren)에서 태어났다. 1883년 2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3월 28 일부터 말레이시아 페낭(Penang) 신학교에서 5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한 뒤, 1888년 조선교구로 배속되어 이듬해 2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와 제3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1896년 황해도 지역 전담 사제로 결정됨에 따라 매화동(?花洞) 본당과 청계동(淸溪洞) 본당 초대 주임을 차례로 맡아 성당을 건립하였고, 진남포(鎭南浦)에도 성당부지를 마련하는 등 교 세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청계동에서 세례성사로 인연을 맺은 안중근 토마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포살로 투옥되자, 뮈텔 주교의 불허에도 뤼순(旅順) 형무소를 찾아가 안중근에게 고 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이 때문에 1910년 3월 15일부터 60일간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 았고, 뮈텔 주교와의 불화로 1914년 4월 22일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후 고향 알자 스(Alsace)에서 사목하면서도 한국에 관한 관심과 애정만은 버리지 않았으며, 1919년 베르사유 조 약이 진행될 당시 파리를 방문한 한국 측 대표를 도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 다. 1938년 5월 16일 모젤 지방의 사랄브(Sarralbe) 요양소에서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