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일기

수천 년 지혜를 만나는 가장 손쉬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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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12/18
Pages/Weight/Size 135*210*35mm
ISBN 9791171172573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꾼 대학자
현실에 발을 붙인 개혁에 몰두하다

아르테의 새로운 고전 시리즈, 〈클래식 아고라〉의 네 번째 편인 『경연일기』는 조선의 천재 유학자이자 경세가였던 율곡 이이의 저작으로, 1565년(명종 20년)부터 1581년(선조 14년)까지의 경연 내용을 담고 있다. 경연은 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서 경전이나 역사서 등을 강론하던 일을 의미한다. 강론이 끝난 뒤에는 국왕과 신하가 함께 고금의 도의를 논하고, 정치와 국정 현안 등을 토론하기도 했다.

율곡은 흔히 이기일원론을 정립한 유학의 거두로 알려져 있지만,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에 기반해 개혁을 주장한 정치가로도 크게 활약했다. 『경연일기』는 율곡이 중앙에서 관직을 지내던 당시에 남긴 것으로, 국정 전 분야의 구체적 개혁안이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던 공납 문제는 이이가 제안한 수미법으로 개선되었고, 수미법은 후에 큰 변화 없이 대동법으로 정착되었다.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던 시기는 조선의 크나큰 폐단이었던 붕당 정치가 심화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율곡은 붕당 간 대립 해소에 힘썼을 뿐 아니라 정쟁에만 치중하는 붕당을 가리지 않고 비판했다. ‘편들기’를 기대한 이들에게 미움이나 비난을 받음에도 ‘모난 돌’이 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였지만 불교, 도가 등을 폭넓게 수용했을 뿐 아니라, 실리를 추구하는 실학 정신을 보여주었다. 대학자임에도 대동사회를 건설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개방적인 자세로 현실에 발 디딘 개혁안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당파 싸움에 몸담지 않고 백성과 나라만을 고민한 그의 개혁 정신이 『경연일기』에 잘 담겨 있다.
Contents
서문

경연일기

1565년(을축) 명종 20년
1566년(병인) 명종 21년
1567년(정묘) 명종 22년, 선조 즉위년
1568년(무진) 선조 1년
1569년(기사) 선조 2년
1570년(경오) 선조 3년
1571년(신미) 선조 4년
1572년(임신) 선조 5년
1573년(계유) 선조 6년
1574년(갑술) 선조 7년
1575년(을해) 선조 8년
1576년(병자) 선조 9년
1577년(정축) 선조 10년
1578년(무인) 선조 11년
1579년(기묘) 선조 12년
1580년(경진) 선조 13년
1581년(신사) 선조 14년

해설

성리학과 실학의 절묘한 조화
하나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
사회 개혁의 대하드라마, 경연일기
과거와의 대화, 오늘의 거울

율곡 이이의 생애(연보)와 관직
미주
Author
율곡 이이,유성선,유정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