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체어맨

폴 볼커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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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5/09
Pages/Weight/Size 148*210*30mm
ISBN 9791169091022
Categories 경제 경영 > 경영
Description
“끝났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긴축을 계속할 것입니다we will keep at it.”_제롬 파월 현 연준 의장, 2022년 6월 잭슨홀 연설

현 연준 의장 제롬 파월이 여러 차례 제목을 인용한, 역대 최고의 연준 의장 폴 볼커의 회고록 Keeping At It이 드디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금융 및 경제정책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소식 밝은 이들은 이미 원서를 구해 읽기도 했다는 필독서 중의 필독서다. ‘권총을 품고 다니면서까지 고물가 정책을 펼친 의장’ ‘인플레이션 파이터’ ‘볼커 룰의 입안자’ 등 그 쟁쟁한 이력과 인상적인 별명을 아는 이도 많을 것이다. 파월의 언급이 보여주듯, 볼커는 지금도 경제정책 분야에서 아주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타계할 때까지도 종종 ‘의장님Mr. Chairman’으로 불리곤 했다.

연준 의장으로서 198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제어해낸 것이 볼커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다. 그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연준 의장 외에도 재무부 차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직을 역임하는 등 30년 가까이 미국 정부에서 직접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한 굴지의 경제 관료다. 고정환율제가 종료된 국제금융의 역사적 순간에도 그가 있었으며, 퍼스트펜실베이니아, 콘티넨털일리노이 등 여러 대형 은행이 파산할 때마다 성공적으로 대처하여 거대 금융 위기를 막아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볼커는 지난 세기 중후반 세계 경제가 요동치던 현장 속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공직자들의 권한보다 책임을 중시하며, 물가안정이라는 경제기관의 중차대한 임무를 강조하고, 어떻게 하면 국민의 삶을 이롭게 할 ‘유능한 정부’가 가능할지 묻는다. 근시안적인 욕망 때문에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건전한 금융’을 바로 세우는 것 또한 그의 오랜 관심사였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볼커가 국제금융에 남긴 영향력을 새로이 알게 되는 것 외에도, 경제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기획되고 실행되며 정치와 상호작용하는지, 효율적인 정책 결정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과 태도가 필요한지를 1인칭 시점으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Contents
추천사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어느 지혜로운 늙은 앵무새
1장 공직자의 아들
2장 프린스턴, 하버드, 런던
3장 젊은 이코노미스트
4장 워싱턴으로
5장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자리
6장 통화개혁, 좌절되다
7장 다시 출발점으로
8장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9장 국내 그리고 국제 금융위기들
10장 미완의 임무: 금융시스템의 복구
11장 연준 이후
12장 수많은 의장직
13장 진실함을 좇다
14장 회계기준 제정
15장 새로운 금융의 세계: 붕괴와 개혁
16장 세 가지 진정한 가치
나가며: 칭송받아 마땅한 사람들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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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폴 볼커,크리스틴 하퍼,남민호
1927년 미국 뉴저지 주 케이프 메이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다양한 학생모임에서 활동했고, 정치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또래들과 선생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책에 특화한 프린스턴대학교 우드로 윌슨 스쿨(Woodrow Wilson School)을 최우등으로 마쳤다. 그는 졸업논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데 실패한 점을 비판했다.

뉴욕 연준에서 리서치 보조로 일하다가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해 정치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런던정경대에서 수학했다. 1952년 뉴욕 연준에서 풀타임 이코노미스트로 재직하다 1957년에 체이스맨해튼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금융 담당 이코노미스트로 일했다. 이후 1962년에 자신의 멘토인 로버트 루사에 의해 재무부 금융분석국장으로 등용되었고, 1963년 미국 재무부 통화 담당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1965년에 다시 체이스맨해튼은행 부행장 겸 기획 담당 임원으로 있다가 1969년에 닉슨 행정부의 부름을 받고 1974년까지 재무부 국제통화 담당 차관을 역임했다. 1971년 8월 15일 금태환 정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볼커는, 이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고 회고했다.

1975년 뉴욕 연준 총재를 거쳐 1979년 8월 카터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볼커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나타났던 대대적인 인플레이션을 공격적인 통화긴축정책으로 퇴치하면서 ‘인플레이션 파이터’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1980년 3월 14.8%까지 올라갔던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1983년에는 3% 밑으로 떨어졌다. 볼커 의장의 연준은 1979년 평균 11.2%이던 연방기금금리를 1981년 6월 20%까지 인상했다. 1981년 프라임 레이트(prime rate)가 21.5%까지 상승하는 과정에서 경기침체에 빠졌고(1980~1982년), 실업률이 10% 위로 올라갔다. 당시 연준에 항의하는 전례 없는 강력한 시위가 발발했다.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와 연준 본관 에클스빌딩을 봉쇄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볼커는 언제까지 인플레이션과 싸울 것이냐는 세간의 항의에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잡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볼커의 뚝심은 성과로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이 떨어지면서 미국 경제성장의 여건을 조성한 것이다. 이후 1982년부터 통화긴축을 풀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경제성장세를 재개했다. 볼커는 1983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연준 의장에 연임되었다.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악화하는 미국의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에 대응하면서, 독일과 일본 등이 달러에 대해 자국 통화를 절상하도록 유도했다.

1987년 8월 연준 의장에서 퇴임한 뒤에도 볼커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멘토로 활약했다. 후임자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볼커처럼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여든이 넘은 볼커에게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직(2009년 2월-2011년 1월)을 맡겼다. 볼커는 은행들의 자기매매와 프라이빗 에쿼티 및 헤지펀드와의 거래를 제한하는 내용의 강력한 금융규제를 발표했다. 이러한 볼커의 정책은 ‘볼커룰(Volcker Rule)’이라 불리며, 금융과잉을 막는 예방장치 역할을 해왔다.

“연준이 금리인하를 더 하지 않아 미국 경제가 망가지고 있다면서 미국의 적은 중국이 아니라 연준”이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불평에, “중앙은행은 정치적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 공정성을 지켜내야 한다”며 맞섰던 볼커는, 2019년 12월 8일 92세로 영면했다.
1927년 미국 뉴저지 주 케이프 메이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다양한 학생모임에서 활동했고, 정치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또래들과 선생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책에 특화한 프린스턴대학교 우드로 윌슨 스쿨(Woodrow Wilson School)을 최우등으로 마쳤다. 그는 졸업논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데 실패한 점을 비판했다.

뉴욕 연준에서 리서치 보조로 일하다가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해 정치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런던정경대에서 수학했다. 1952년 뉴욕 연준에서 풀타임 이코노미스트로 재직하다 1957년에 체이스맨해튼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금융 담당 이코노미스트로 일했다. 이후 1962년에 자신의 멘토인 로버트 루사에 의해 재무부 금융분석국장으로 등용되었고, 1963년 미국 재무부 통화 담당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1965년에 다시 체이스맨해튼은행 부행장 겸 기획 담당 임원으로 있다가 1969년에 닉슨 행정부의 부름을 받고 1974년까지 재무부 국제통화 담당 차관을 역임했다. 1971년 8월 15일 금태환 정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볼커는, 이 일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고 회고했다.

1975년 뉴욕 연준 총재를 거쳐 1979년 8월 카터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볼커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나타났던 대대적인 인플레이션을 공격적인 통화긴축정책으로 퇴치하면서 ‘인플레이션 파이터’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1980년 3월 14.8%까지 올라갔던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1983년에는 3% 밑으로 떨어졌다. 볼커 의장의 연준은 1979년 평균 11.2%이던 연방기금금리를 1981년 6월 20%까지 인상했다. 1981년 프라임 레이트(prime rate)가 21.5%까지 상승하는 과정에서 경기침체에 빠졌고(1980~1982년), 실업률이 10% 위로 올라갔다. 당시 연준에 항의하는 전례 없는 강력한 시위가 발발했다.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와 연준 본관 에클스빌딩을 봉쇄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볼커는 언제까지 인플레이션과 싸울 것이냐는 세간의 항의에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잡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볼커의 뚝심은 성과로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이 떨어지면서 미국 경제성장의 여건을 조성한 것이다. 이후 1982년부터 통화긴축을 풀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경제성장세를 재개했다. 볼커는 1983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연준 의장에 연임되었다.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악화하는 미국의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에 대응하면서, 독일과 일본 등이 달러에 대해 자국 통화를 절상하도록 유도했다.

1987년 8월 연준 의장에서 퇴임한 뒤에도 볼커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멘토로 활약했다. 후임자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볼커처럼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여든이 넘은 볼커에게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직(2009년 2월-2011년 1월)을 맡겼다. 볼커는 은행들의 자기매매와 프라이빗 에쿼티 및 헤지펀드와의 거래를 제한하는 내용의 강력한 금융규제를 발표했다. 이러한 볼커의 정책은 ‘볼커룰(Volcker Rule)’이라 불리며, 금융과잉을 막는 예방장치 역할을 해왔다.

“연준이 금리인하를 더 하지 않아 미국 경제가 망가지고 있다면서 미국의 적은 중국이 아니라 연준”이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불평에, “중앙은행은 정치적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 공정성을 지켜내야 한다”며 맞섰던 볼커는, 2019년 12월 8일 92세로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