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한문역 - 대방세가언행록

$207.00
SKU
9791168878150
+ Wish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Wed 11/6 - Tue 11/12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Fri 11/1 - Tue 11/5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24/08/15
Pages/Weight/Size 188*257*30mm
ISBN 9791168878150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조선후기 문신 윤행임이 선대 47인의 행장 · 묘갈 · 언행 등을 모아 1789년에 간행한 언행록. 6권 3책. 목활자본. 1789년(정조 13)에 간행하였으며, 권두에 자서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Author
윤행임,국사편찬위원회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행임(尹行任). 자는 성보(聖甫), 호는 석재(碩齋). 윤홍(尹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용안군(龍安君) 윤종주(尹宗柱)이다. 아버지는 익찬(翊贊) 윤염(尹琰)이며, 어머니는 조종철(趙宗哲)의 딸이다. 1782년(정조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주서를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어 규장각대교에 임명되었다. 시파(時派)로서 1788년 민치화(閔致和)와 함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는 벽파(僻派)의 탄핵을 받아 성환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규장각직각으로 복직되었으며 1792년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그 해 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비변사부제조로 특차되었다가 이조참의로 복직되었으나, 벽파의 공격으로 제학 정민시(鄭民始)와 함께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1794년 유배에서 풀려 나와 서유방(徐有防)·이시수(李時秀) 등과 함께 정리사(整理使)가 되었으며, 이조참의로 재차 임명되었으나 황단대향(皇壇大享)의 헌관으로 의빈(儀賓)을 전차(塡差)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선혜청제조·관상감제조·이조참판·홍문관제학을 거쳐 실록청이 개국될 때 양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이 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시파를 추방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박해로 강진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예조판서·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척신 김조순(金祖淳)의 사주를 받은 옥당(玉堂)으로부터 서학을 신봉했다는 탄핵을 받아 신지도에 안치되었다가 곧 참형당하였다. 헌종 초에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행임(尹行任). 자는 성보(聖甫), 호는 석재(碩齋). 윤홍(尹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용안군(龍安君) 윤종주(尹宗柱)이다. 아버지는 익찬(翊贊) 윤염(尹琰)이며, 어머니는 조종철(趙宗哲)의 딸이다. 1782년(정조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주서를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어 규장각대교에 임명되었다. 시파(時派)로서 1788년 민치화(閔致和)와 함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는 벽파(僻派)의 탄핵을 받아 성환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규장각직각으로 복직되었으며 1792년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그 해 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비변사부제조로 특차되었다가 이조참의로 복직되었으나, 벽파의 공격으로 제학 정민시(鄭民始)와 함께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1794년 유배에서 풀려 나와 서유방(徐有防)·이시수(李時秀) 등과 함께 정리사(整理使)가 되었으며, 이조참의로 재차 임명되었으나 황단대향(皇壇大享)의 헌관으로 의빈(儀賓)을 전차(塡差)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선혜청제조·관상감제조·이조참판·홍문관제학을 거쳐 실록청이 개국될 때 양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이 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시파를 추방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박해로 강진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예조판서·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척신 김조순(金祖淳)의 사주를 받은 옥당(玉堂)으로부터 서학을 신봉했다는 탄핵을 받아 신지도에 안치되었다가 곧 참형당하였다. 헌종 초에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