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 : 윤봉길선생편

1952년 오리지널 초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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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4/05/30
Pages/Weight/Size 152*225*15mm
ISBN 9791168877177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윤봉길의사가 1930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예산을 떠나면서 남긴 ‘이향시(離鄕詩)’ 한글 원문이 공개됐다. 이 시는 윤봉길의사 기념사업을 하는 월진회(月進會)의 윤주(尹洲) 이사가 국회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으로 ‘애국정신선양회’가 1951년 발행한 ‘애국지’ 시리즈 가운데 ‘의사 윤봉길 선생’편에 실려 있었다.

윤이사는 “1933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된 중국어판 ‘윤봉길전’(김광 지음)에 이 시의 중국어 번역문이 실려 있긴 하지만 한글 원문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2]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대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2]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2]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Contents
1. 켜지지 않는 성냥 (7)
2` 의사의 탄생. (15)
3. 자라 나면서. (학교공부 16)
4. 진리를 찾아서 ·· (독학) (21)
6. 망국민의 설움 (1.상공업 2.관리 3.농촌. 4.수리조합. 5.어촌과 광산 동경지진) (24)
6. 후생회 설립 (32)
7. 월진회의 조직 (35)
8. 할아버지의 유언 (40)
9. 유랑의 길 (42)
10. 유랑시 (45)
11. 신의주를 거쳐 청도로 (47)
12. 종에게 (52)
13. 상해시대 (53)
14. 친목회 조직 (58)
15. 때는 왔다 (60)
16. 의거의 준비 (63)
17. 일편단심 (69)
18. 유가족을 찾아서 (78)
Author
애국정신선양회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훙커우공원 투탄 의거를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 호: 매헌(梅軒)
본관 :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
윤봉길은 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사망했다. 3.1운동 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 농민계몽·부흥 운동에 전력했다. 1930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 상해로 옮긴 후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 김구의 주관 하에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 후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 · 농촌부흥운동 ·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 · 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壹)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훙커우공원 투탄 의거를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 호: 매헌(梅軒)
본관 :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
윤봉길은 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사망했다. 3.1운동 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 농민계몽·부흥 운동에 전력했다. 1930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 상해로 옮긴 후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 김구의 주관 하에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 후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 · 농촌부흥운동 ·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 · 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壹)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