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령 조선과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이다.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 상수시(尙壽施), 석경(石耕), 석경생(石耕生).[1]
황해도 해주군 출신. 과수원을 경영하는 부모 아래서 자라났으며 제2고보를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졸업하였으며 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사토 기요시 교수의 은덕을 입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강사에 임명되나 타 교수진의 반대로 인하여 해임되었고, 이후 보성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앤드류 브래들리를 소개한 〈미숙한 문학〉으로 평단에 데뷔하였으며, 주지주의 문학론을 본격 도입하였다. 비평활동이 중기에 드는 무렵 지성론을 발표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 김문집과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8년 평론집 《문학과 지성》을 발표. 전시에는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다.
광복 이후 평단에서 물러앉아 대학으로 돌아갔으며 문학개론, 영문학사, 영국문예비평사 따위를 강의하였다. 또한 셰익스피어 연구에 진력하였다. 1964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일제령 조선과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이다.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 상수시(尙壽施), 석경(石耕), 석경생(石耕生).[1]
황해도 해주군 출신. 과수원을 경영하는 부모 아래서 자라났으며 제2고보를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졸업하였으며 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사토 기요시 교수의 은덕을 입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강사에 임명되나 타 교수진의 반대로 인하여 해임되었고, 이후 보성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앤드류 브래들리를 소개한 〈미숙한 문학〉으로 평단에 데뷔하였으며, 주지주의 문학론을 본격 도입하였다. 비평활동이 중기에 드는 무렵 지성론을 발표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 김문집과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8년 평론집 《문학과 지성》을 발표. 전시에는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다.
광복 이후 평단에서 물러앉아 대학으로 돌아갔으며 문학개론, 영문학사, 영국문예비평사 따위를 강의하였다. 또한 셰익스피어 연구에 진력하였다. 1964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