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천도교청년회에서 신문화운동을 바탕으로 조선인의 계몽을 위하여 창간한 잡지. 천도교월간잡지.
A4판. 160쪽 내외. 천도교단(天道敎團)에서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1920년 6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천도교는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민족문학 수립과 민족전통 문화유산 확립을 기본으로 언론·학술·종교·문예를 게재하는 종합월간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후천개벽사상’에서 이름을 따 ‘개벽사’를 창업하고 『개벽』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창간 당시 사장은 최종정(崔宗禎), 편집인은 이돈화(李敦化), 발행인은 이두성(李斗星), 인쇄인은 민영순(閔泳純) 등이었다. 창간 이유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 지면의 약 3분의 1을 문학과 예술면으로 할애하여 소설·시조·희곡·수필·소설이론·그림 등을 게재하였고, 문체는 국한문혼용체를 썼다.
그러나 창간호는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다.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으나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하였다. 그 뒤에도 시련은 계속 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8월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다. 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40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 등 많은 압력과 박해를 받았으며, 그로 인한 경영난도 심각하였다.
1934년 11월 차상찬(車相讚)이 『개벽』을 속간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 내었으나, 1935년 3월 1일 다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개벽』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김기전(金起田)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하여, 1926년에 폐간된 『개벽』의 홋수를 이어 제73호부터 시작하여 1949년 3월 25일(통권 제81호)까지 모두 9호를 발행하고 자진 휴간하였다.
최근 일제에 의해 압수·삭제된 149개의 기사 중 기존 영인본에서 누락되었던 21개의 기사(작품) 원문이 한 연구서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Contents
1권 ∼ 25권
Author
천도교 청년회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천도교의 청년단체. 1919년 9월 천도교 내의 청년들이 교리의 연구 및 선전, 그리고 조선의 문화향상과 발전을 목적으로 천도교교리강연부(天道敎敎理講硏部)를 설립하였고 1920년 3월 이 강연부를 개편하여 천도교청년회라 이름을 고쳤다.
이 청년회에서는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하는 한편 체육부를 두어 야구단을 조직하고 덴마크식 체조를 보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4월에는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청년회 내에 소년부를 설립하고 5월에는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1922년 6월에는 여성잡지 『부인』을 창간하였고 다음해 3월에는 소년잡지 『어린이』를 발간함으로써 우리나라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여 나갔다.
이 청년회를 주도한 인물은 이돈화(李敦化)·정도준(鄭道俊)·박달성(朴達成)·박내홍(朴來弘)·김옥빈(金玉斌)·이두성(李斗星)·신태련(申泰鍊) 등이었으며 이 단체는 1923년 9월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천도교청년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천도교의 청년단체. 1919년 9월 천도교 내의 청년들이 교리의 연구 및 선전, 그리고 조선의 문화향상과 발전을 목적으로 천도교교리강연부(天道敎敎理講硏部)를 설립하였고 1920년 3월 이 강연부를 개편하여 천도교청년회라 이름을 고쳤다.
이 청년회에서는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하는 한편 체육부를 두어 야구단을 조직하고 덴마크식 체조를 보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4월에는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청년회 내에 소년부를 설립하고 5월에는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1922년 6월에는 여성잡지 『부인』을 창간하였고 다음해 3월에는 소년잡지 『어린이』를 발간함으로써 우리나라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여 나갔다.
이 청년회를 주도한 인물은 이돈화(李敦化)·정도준(鄭道俊)·박달성(朴達成)·박내홍(朴來弘)·김옥빈(金玉斌)·이두성(李斗星)·신태련(申泰鍊) 등이었으며 이 단체는 1923년 9월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천도교청년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