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354년(공민왕 3) 진주목(晋州牧)에서 개판(開版)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하는 것은 없고 일본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에 수장되어 있는 고려판이 유일본이다. 1930년 일본의 육덕재단(育德財團)에서 존경각의 전적 가운데에서 선본(善本)을 가려 영인본을 간행할 때에 『졸고천백』도 영인되어 현재 규장각 도서에 있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고려명현집(高麗明賢集)』 2집과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 3집에 영인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06년에 번역하였다.
『졸고천백』에는 45편의 산문이 시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권1은 서(序) 6편, 기(記) 4편, 후제(後題) 2편, 발 1편, 묘지 3편, 묘지명 4편, 문책(問策) 1편, 권2는 서 5편, 묘지 9편, 행장 1편, 서(書) 3편, 제문 1편, 영혼사(迎魂辭) 2편, 비문 1편, 전(傳) 1편이 수록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이 중 32편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최해가 편찬한 『동인지문(東人之文)』의 자서(自序)인 「동인지문서」에 따르면, 시 약간수를 오칠(五七), 문 약간수를 천백(千百), 변려문(騈儷文) 약간수를 사륙(四六)이라 하였다. 『졸고천백』의 ‘천백’도 바로 이 문을 두고 한 이름이다. 이 책에는 한편의 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문선』에 약 30수가 뽑혀 있으므로 최해의 다른 저작집이 당대에 간행된 듯하다.
최해의 저술로는 이외에도 『예산농은졸고(猊山農隱拙藁)』·『귀감(龜鑑)』·『예산선집(猊山選集)』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이 문집과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동인지문오칠(東人之文五七)』뿐이다. 『동인지문』 25권은 전질이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과 더불어 우리나라 시문의 선발 책자로서 선구적이다.
최해가 비점을 한 『삼한시귀감』은 우리나라 시선집으로서는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한시귀감』의 시편 중에는 「현재설야(縣齋雪夜)」와 같은 명작이 있다. 편서에서는 문장의 체재와 품격을 절실하게 파악하는 높은 감식력을 보여주고 있다.
『졸고천백』에는 우리나라 한문학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넘어오는 과도기적 상황을 재현시켜 놓았다. 그 중에서도 「해동후기로회서(海東後耆老會序)」·「동인지문서」·「동인사륙서(東人四六序)」 등은 문학사에서 주목해야 할 글들이다.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후기 『예산은자전』, 『졸고천백』 등을 저술한 문인. 최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를 거쳐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주부로 기용되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뒤에 1320년(충숙왕 7) 안축(安軸)·이연경(李衍京)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최해만 급제하였다.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 5개월만에 병을 핑계하고 귀국하였다. 예문응교(藝文應敎)·검교(檢校)·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