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최대의 학생단체.
재미한인 유학생 상호간의 친목 도모, 학업과 진로를 위한 정보교류, 그리고 독립운동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인 1918년 12월 30일 오하이오주 달러웨와 콜럼버스 거류 한인 유학생들은 대전 종결 이후 개최될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하기 위해 미주대한인학생회(또는 ‘북미대한인유학생회’, The Korean Student League of America)를 발기하고 1919년 1월 1일 정식 결성하였다. 미주대한인유학생회는 대한인국민회와 교섭해 영문 잡지를 발간하였고 이어서 서재필이 주관한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에서 Korea Review(『한국평론』)를 발행하였다.
미주대한인학생회 결성 이후 시카고, 다뉴바,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각지에서 한인학생들의 독자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한인학생들은 1919년 9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학생공동회를 열고 학생회 통합을 결의하였고, 1920년 11월 11일 북미대한인유학생회포고서를 발표해 통합 학생회의 설립 목적과 활동 방침을 알렸다. 그 후 1921년 4월 30일 미국 내 11개 지역 학생대표들이 뉴욕에서 모인 가운데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를 결성하였다. 이 때 초대 회장은 이용직, 부회장은 조병옥으로 선출하였다. 이로 볼 때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오하이오주에서 결성한 미주대한인학생회를 바탕으로 시작되었으나 통합 체제를 갖춘 때는 1921년부터였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결성이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활발히 활동하였다. 매년 6월 하기방학을 이용해 정기 연회(年會)를 개최해 현안문제를 비롯한 각종 시국과 시사문제를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국제YMCA 산하 해외학생우호관계위원회의 지원 아래 1922년 12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영문 월간잡지인 The Korean Student Bulletin(『한국학생회보』)를 발간하였고, 자체의 기관지로 1925년부터 1936년까지 국문 잡지 『우라키』를 발간하였다. 또 미일전쟁 이후인 1942년 4월부터 1944년 4월까지 The Free Korea를 발간하였다.
외부 활동으로는 1932년 버팔로의 국제학생지원대회, 1935년 시카고의 동양학생대회 등 미국에 개최하는 각종 국제학생대회에 한국대표를 파견해 한국사정을 선전하였다.
독립운동 활동과 관련해서는 광주학생운동 직후 투옥되거나 부상당한 학생들의 구호를 위한 의연금 송금, 윤봉길의거 직후 안창호 체포에 대한 석방운동, 중일전쟁 발발시 일제의 침략규탄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미일전쟁 발발 후인 1943년 12월부터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여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워싱턴사무소 개소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면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학업 수행을 위한 방편으로 학생 간의 친목과 복리증진, 각종 정보교류 등에 전념하였고, 민족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미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한인학생들로 구성되어 강력한 조직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점, 학생들의 관심이 학업 성취와 진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 등 때문이었다. 미일전쟁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해 미주한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함께 공동활동을 전개하였지만, 학생신분의 한계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독립될 새 국가 건설의 인재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해방 후 근대적인 국가건설에 참여하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