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월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발기인 정영택(鄭永澤)을 비롯, 기호인사 105명이?서울 신문로의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초대회장에 이용직(李容稙), 부회장에 지석영(池錫永), 총무에 정영택을 선출하였다. 평의원은 유성준(兪星濬)·석진형(石鎭衡)·이상재(李商在)·윤효정(尹孝定)·장헌식(張憲植)·정교(鄭喬)·장도(張燾)·유근(柳瑾)·유일선(柳一宣)·안종화(安鍾和) 등 10명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의 중심지인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기호흥학회는 늦게 결성되어 1908년 8월부터 기관지 『기호흥학회월보』를 발행하였다. 회원의 면모는 이용직, 신기선, 정만조, 안종화 같은 유림의 원로 및 정부 고관부터 박정동, 유병필, 안국선처럼 근대학문을 익힌 신진 인사들까지 다양했다. 이 학회는 다른 학회처럼 기호학교를 운영했으며 기관지에는 이 학교 소속 인사들도 자주 참여했다. 이종일, 오세창처럼 천도교 관계 인물들도 있고 대한자강회 회장 윤효정이 기호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뒤에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김가진, 조완구와 어윤적, 윤치오, 민종묵 같은 후일의 일제 중추원 의원들도 같이 학회에 참여했다. 서울 · 경기 · 충청이라는 조선의 전통적 지역을 기반으로 한 만큼 다양한 성향의 주요 인사들이 모일 수 있었다.
발행인은 김규동(金奎東), 편집인은 이해조(李海朝)이다. 1909년 7월까지 월간·국판으로 통권 12호를 발간했으나, 내용이 국권 회복에 관계된다 하여 제6·9·10·11호 등이 여러 번 압수되기도 하였다. 창간호에는 의친왕의 ‘咸與維新(함여유신)’이라는 친필을 실었다. 1910년 9월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