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평론

일간《시사신문》의 후신 시사평론 1922년 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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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06/30
Pages/Weight/Size 152*220*80mm
ISBN 9791168870963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시사평론(時事評論)》은 1922년 4월 15일자로 창간된 시사평론지인데, 이는 당시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시사신문(時事新聞)》사장 민원식(閔元植 1887~1921)이 애국청년에게 피살되자 신문은 폐간되고, 그 일간신문의 후신으로 나온 월간잡지이다. 잡지를 소개하기 전에 그 시대의 주변 상황과 그 우여곡절을 먼저 살펴보자.

3·1운동 후, 1919년 9월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또(?藤實)가 소위 문화정책이라는 명분으로 1920년부터 조선인에게도 신문 발행을 허가했는데, 이때 《동아일보(東亞日報)》·《조선일보(朝鮮日報)》와 함께 《시사신문(時事新聞)》을 허가받아 발행인이 된 사람이 바로 민원식이다. 그는 당시 친일단체 ‘국민협회’ 회장이었고 이 신문은 곧 국민협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이제 《시사평론》창간호를 보기로 하자.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김상회(金尙會), 인쇄인 이영석(李永錫), 인쇄소 삼영(三英)사, 발행소 시사평론사(서울·수은(授恩)동 59), A5판 157면, 정가 50전이다. 일간신문이 월간잡지로 변신한 이 잡지의 창간사는 무어라고 썼을까? 권두언 〈살아나는 환희(歡喜)〉에서 몇 구절을 옮긴다.(한글 표기 및 띄어쓰기는 현행대로 고쳤음.)

“솟아나는 황색(黃色) 유아(幼芽)는 연(軟)한 흙을 파(破)하고 살아나왔다. 살아나오기 위(爲)하여 영하(零下) 20도(度), 지하(地下) 3척(尺)의 동결중(凍結中)에서 사(死)를 면(免)하고자 한 큰 노력(努力)은, 미구(未久)에 큰 자연(自然)의 력(力)에 의(依)하여 지각(地殼)의 표면(表面)이 점점(漸漸) 따스해 오는 그 간극(間隙)을 돌격(突擊)하여 지피(地皮)를 파(破)하고 살아 나왔다.

인(人)이나 우(牛)나 마(馬)나 견(犬)이나 돈(豚)이나 초(草)나 목(木)이나, 온갖 생물(生物)이 살아나오는 거기는, 참담(慘憺)한 노력(努力)과 숭엄(崇嚴)한 고뇌(苦惱)가 있다. 살아나온 환희(歡喜) 그것은 절대(絶大)하다.〈중략〉 자(玆)에 《시사평론(時事評論)》은 생(生)하였다. 고뇌(苦惱)하고 고뇌(苦惱)하던 《시사평론(時事評論)》은 살아나온 절대(絶大)한 환희(歡喜)에 만(滿)하고 만(滿)하였다. 정치(政治)에 경제(經濟)에 사회(社會)에 문예(文藝)에, ······ 1800만(萬) 동포(同胞)를 위(爲)하여 건투(健鬪)코자 한다.(아연(阿然))〈하략〉”
사장도 떠나고 신문도 없어진 그 자리에서 생겨난 잡지의 창간사로 보면 되겠다. 목차를 본다.

‘휘필(揮筆)’ ··· 재등총독(齋藤總督), 〈사진 화보〉 ‘평화박람회(平和博覽會) 조선관(朝鮮館)’, 〈논문〉 ‘조선통치(朝鮮統治)에 관(關)한 사견(私見)’ ··· 김상회(金尙會)/ ‘조선(朝鮮)에 참정권(參政權)을 부여(附與)하라’ ··· 김아연(金阿然)/ ‘전후(戰後)의 이대사조(二大思潮)와 공정(公正)한 사조(思潮)의 비판(批判)’ ··· 丸山鶴吉(경무국(警務局) 사무관(事務官))/ ‘사회주의(社會主義) 관견(管見)’ ··· 성당(誠堂)/ ‘참정권(參政權)에 대한 오인(吾人)의 의식(意識)’ ··· 김의용(金義用)/ ‘조선(朝鮮)의 산업(産業)에 관한 방침급(方針及) 계획(計劃)의 경개(梗槪)’ ··· 西村保吉(식산국장(殖産局長)), 〈시사평론〉 ‘시사(時事)의 측면관(側面觀)’ 1) 고교내각(高橋內閣)의 전도(前途), 2) 재야당(在野黨)의 합동여하(合同如何), 3) 조선(朝鮮)의 참정권문제(參政權問題), 4) 지나(支那)의 남북통일(南北統一) ··· 팔면자(八面子),

〈문예〉 ‘청구일화(靑丘逸話)’ ··· 남하은(南何隱)/ ‘손각씨’ ··· 형생(炯生)/ ‘찰나적(刹那的) 철학(哲學)’ ··· 관수교인(觀水橋人)/ ‘고향(故鄕)으로부터 돌아와서’ ··· 설봉생(雪峰生)/ ‘순진(純眞)의 애도(愛道)’ ··· 신기루주인(蜃氣樓主人), ‘한시총원(漢詩叢苑)’ / ‘편집여록(編輯餘錄)’, 〈창작〉 ‘무한자본(無限資本)’(각본(脚本)) ··· 조대호(趙大鎬)/ ‘가을해가 저물어갈 때’(소설) ··· 이미세(李微?)/ ‘숙명(宿命)’(소설) ··· 박제호(朴霽湖),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유고(諭告)’ ··· 조선총독(朝鮮總督) 남작(男爵) 齊藤實/ ‘교육령(敎育令) 내용(內容)’ ··· 학무국장(學務局長) 柴田善三郞/ ‘조선참정권요구건백서(朝鮮參政權要求建白書)’/ ‘국민협회(國民協會) 소식(消息)’/ ‘편집실에서’ 등이 게재되었다. 총독 및 총독부 고관의 이름이 여럿이 보인다.

《한국신문잡지총목록》(국회도서관, 1966)에 보면 《시사평론》은 1928년 1월까지 통권 57호가 나온 것으로 기록되었다.

일간 《시사신문》의 후신 시사평론 - 1922. 4 (한국잡지백년2, 2004. 5. 15., 최덕교)
Contents
1권 - 제1 ∼ 3號
2권 - 제4 ∼ 6號
3권 - 제7 ∼ 9號
Author
김상회
김상회(金尙會, 일본식 이름: 豊原以尙, 1890년 4월 10일 ~ 1962년 5월 17일)는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겸 관료.

1906년 동산중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1월 국민협회 평의원으로 임명되었고 1922년 4월 국민협회 총무로 임명되었다.

1922년 4월부터 1923년 9월까지 국민협회 기관지 《시사평론》 편집 겸 발행인을 역임하는 동안 〈조선통치에 관한 사견(1~3)〉(시사평론 1922년 4월호, 1922년 5월호, 1922년 7월호), 〈토지소유권과 소작권〉(시사평론 1922년 8월호), 〈문화정치의 근본정신〉(시사평론, 1922년 9월호), 〈여사(如斯)히 하여 아 사회를 부활하라〉(시사평론, 1922년 11월호)를 기고했고 1923년 《시사평론》 사장 겸 주필을 역임하는 동안 〈회고와 예상의 중간의 입(立)하여〉(시사평론, 1923년 3월호), 〈경제생활의 개선과 부업〉(시사평론, 1923년 7월호), 〈정변과 재해〉(시사평론, 1923년 9월호)를 기고했다. 1924년 4월 16일 국민협회 상담역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매일신보》 편집국장 겸 《경성일보》 이사를 역임했으며 1931년 12월 《매일신보》 논설부 주임을 역임했다. 《서울프레스》 이사(1933년 ~ 1934년)와 《경성일보》 이사(1933년 ~ 1935년)를 역임했고 《매일신보》 논설부장 이사(1936년), 주필 겸 논설부장 이사(1937년), 이사(1938년)를 역임했다. 1938년 9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1940년 3월 19일에 열린 창씨 개명에 대한 강연회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과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김상회(金尙會, 일본식 이름: 豊原以尙, 1890년 4월 10일 ~ 1962년 5월 17일)는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겸 관료.

1906년 동산중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1월 국민협회 평의원으로 임명되었고 1922년 4월 국민협회 총무로 임명되었다.

1922년 4월부터 1923년 9월까지 국민협회 기관지 《시사평론》 편집 겸 발행인을 역임하는 동안 〈조선통치에 관한 사견(1~3)〉(시사평론 1922년 4월호, 1922년 5월호, 1922년 7월호), 〈토지소유권과 소작권〉(시사평론 1922년 8월호), 〈문화정치의 근본정신〉(시사평론, 1922년 9월호), 〈여사(如斯)히 하여 아 사회를 부활하라〉(시사평론, 1922년 11월호)를 기고했고 1923년 《시사평론》 사장 겸 주필을 역임하는 동안 〈회고와 예상의 중간의 입(立)하여〉(시사평론, 1923년 3월호), 〈경제생활의 개선과 부업〉(시사평론, 1923년 7월호), 〈정변과 재해〉(시사평론, 1923년 9월호)를 기고했다. 1924년 4월 16일 국민협회 상담역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매일신보》 편집국장 겸 《경성일보》 이사를 역임했으며 1931년 12월 《매일신보》 논설부 주임을 역임했다. 《서울프레스》 이사(1933년 ~ 1934년)와 《경성일보》 이사(1933년 ~ 1935년)를 역임했고 《매일신보》 논설부장 이사(1936년), 주필 겸 논설부장 이사(1937년), 이사(1938년)를 역임했다. 1938년 9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1940년 3월 19일에 열린 창씨 개명에 대한 강연회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과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