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활자 정리자(整理字)로 간행되었다. 책 앞부분에 정조의 어제윤음(御製綸音)과 당시 좌승지 이만수(李晩秀)의 서(序)가 실려 있다. 현재 초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중간본은 1859년(철종 10)에 목판으로 간행되었는데, 김병학(金炳學)의 서문이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각 이본(異本)에는 장서기(藏書記)·내사기(內賜記)와 소장기관의 인(印) 및 교열자의 명단 등이 기재, 수록되어 있다. 또한, 삽화본과 언해가 실려 있어, 간본의 변천은 조선시대 판화의 변천과 함께 국어사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서지학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당초에 이 책은 정조의 명에 따라 세종 때 설순(?循)이 지은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종 때 조신(曺伸)이 편찬한 『이륜행실도』를 합책하여 수정한 것을 같은 해에 간행한 것이다.
정조는 서문에서 “앞서 간행된 삼강(三綱)·이륜(二倫)이라는 책이 선후로 발간되어 학관(學官)에 반포되어 있어 백성을 감화시키고 풍속을 좋게 이룩하는 근본이 되었으므로, 두 책을 표준으로 삼아 향음례(鄕飮禮)를 강조하고 행하게 하고자” 이 책을 간행함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이 모든 일반 백성을 대상독자로 삼고 있음은 권채(權採)의 서문에도 있듯이, 도판을 먼저 싣고 그 다음에 행적을 붙임으로써 백성들이 그림을 통하여 흥미를 가지게 되고, 연후에 설명을 읽도록 한 체제상의 특징에서도 볼 수 있다.
책의 내용으로 권1에서 권3까지 수록된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은 앞서 간행된 『삼강행실도』 중에서 발췌, 수록하고 있다.
즉, 권1의 효자도(孝子圖)에는 민손단의(閔損單衣)를 포함한 역대명현 33인의 효행이 실려 있고, 권2의 충신도에는 용방간사(龍?諫死)를 포함한 35인의 충신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충신도에는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항목도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권3인 열녀도에는 백희체화(伯姬逮火) 등 35인의 역대 열녀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한편, 권4·권5의 충신·종족·붕우·사생은 앞의 『이륜행실도』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즉, 권4의 형제도(兄弟圖)에는 급수동사(伋壽同死)를 포함한 24인의 우애를, 종족도(宗族圖)에는 군량척처(君良斥妻) 등 7인의 사실을, 권5에는 누호양여(樓護養呂) 등 붕우 11인과 사생(師生) 5인의 선행을 기록하고 있다. 수록된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인이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인, 충신 6인, 열녀 5인만이 실려 있다.
최근에는 초간본을 대본으로 하여 1972년 을유문화사에서 영인, 간행하였는데, 이 영인본에는 이민수(李民樹)의 국역과 역자의 해제가 동시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서, 또한 국어사의 연구 및 전통 회화사의 연구를 위해서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책이다.
조선 후기 판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수록한 인물마다 행실을 기리는 찬(贊)과 시를 적은 글 다음에 삽화를 배치하여 모두 150점의 판화를 실었다. 내용과 기법에 있어서 인물·풍속·산수·건물 등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고, 당시 유행한 화풍이 반영되어 있으며, 새김기술이 정교하다.
구성을 보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서와 같이 다른 시간에 벌어진 2, 3개의 장면을 한 화면에 엮는 복합적인 구성에서 탈피하여 한 장면만을 부각하여 보다 간단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아울러 전통적인 부감법(俯瞰法)의 시점을 사용하고 긴장감이 강한 사선구도를 기본으로 하였다.
『삼강행실도』에 비하여 주변의 경물이 다양하고 나무의 종류도 많아졌으며, 건물을 위용있게 그려 보다 풍부하게 화면을 구성하였다. 각선(刻線)의 흐름도 보다 유려하여졌고, 가늘고 굵은 선을 대상에 따라 적절히 그렸다.
인물의 표현, 수지법(樹枝法), 준법(?法) 등을 보면 당시 도화서(圖畵署)를 중심으로 유행한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이 역력하다. 그러나 아직 김홍도가 그렸다는 증거가 밝혀지지 않았고, 이러한 유형의 작업에는 여러 명의 화원과 각수(刻手)가 참여한 예로 보아, 김홍도나 당시 그의 화풍을 보인 김득신(金得臣)·이인문(李寅文)·장한종(張漢宗) 등의 화원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말기에는 판화를 소재로 하여 민화에서 다수 그려졌고, 글과 판화를 필사(筆寫)한 책이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판화 가운데 「효아포시(孝娥抱屍)」·「누백포호(婁伯捕虎)」·「정부청풍(貞婦淸風)」·「명수구관(明秀具棺)」·「중암의장(仲淹義莊)」 등은 작품성이 뛰어나다.
[오륜행실도]의 구성은 이야기 하나당 그림, 한문 해설, 한글 번역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앞면에는 그림이 있고, 그 뒷면에 한문 해설과 한글 번역이 수록된 것이다. 내용이 자세하다 보니 대개 앞뒤 한 장을 넘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는 이야기 하나가 앞뒤 한 장에 대부분 담겨 있는데 앞면은 그림, 뒷면은 한문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 번역은 그림의 상단에 수록되었고, 번역이 길어지면 뒷면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오륜행실도]의 구성 양식은 광해군 대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같다.
Contents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Author
이병모
조선후기 홍문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773년(영조 49) 진사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당시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주청으로 6품에 올랐다. 경기지방·관동지방을 암행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김상로(金尙魯)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조좌랑·대사간·예조참의를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1779년(정조 3) 운산에 유배되고, 1781년에는 사판(仕版)에서 제명되기도 하였다.그러나 곧 특서(特敍)되어 국조보감찬집당상(國朝寶鑑纂輯堂上)·우부승지·동래부사·대사간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인 1784년에 『돈효록(敦孝錄)』을 간행하였다. 이어 대사성·이조참판·예조판서·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794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좌의정을 거쳐 1799년 영의정이 되었다.그동안 1778년 동지부사(冬至副使), 1795년 진하사(進賀使) 등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00년에도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사행(使行) 중에 정조의 상을 당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실록총재관에 임명되고, 1803년(순조 3)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조선후기 홍문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773년(영조 49) 진사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당시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주청으로 6품에 올랐다. 경기지방·관동지방을 암행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김상로(金尙魯)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조좌랑·대사간·예조참의를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1779년(정조 3) 운산에 유배되고, 1781년에는 사판(仕版)에서 제명되기도 하였다.그러나 곧 특서(特敍)되어 국조보감찬집당상(國朝寶鑑纂輯堂上)·우부승지·동래부사·대사간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인 1784년에 『돈효록(敦孝錄)』을 간행하였다. 이어 대사성·이조참판·예조판서·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794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좌의정을 거쳐 1799년 영의정이 되었다.그동안 1778년 동지부사(冬至副使), 1795년 진하사(進賀使) 등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00년에도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사행(使行) 중에 정조의 상을 당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실록총재관에 임명되고, 1803년(순조 3)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