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동경에서 태어났다. 1893년(메이지 26년) 게이오기주쿠 대학(慶應義塾大?)?문학부(文?部) 졸업했다. 렌코지(連光寺) 제25대 주지(住職), 고마자와 대학(駒澤大?) 초대 학장(?長). 불교학(???), 동양 사상사(東洋思想史), 양명학(陽明?) 전공.
일본의 불교학자로 조동종의 승려이자 문학 박사이다. 도호(道號)는 불산(?山). 인도, 중국, 한국 선학(禪學) 사상사 등 동양 선학을 연구했고, 선불교를 내성 주관주의(?省主?主義)로 파악한 이른바 ‘누카리야 선학’(忽滑谷禪學), 누카리야파(忽滑谷派)라 불리는 선학(禪學) 사상을 확립했다.
1925년(59세) 조동종 대학(曹洞宗大學)이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으로 승격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인도와 중국 선학 사상사를 연구한『禪學思想史』(상권, 1923년, 하권, 1925년. 玄黃社)이다. 이 책은 그가 “선가(禪家)에는 아직 사상사가 없었다. 본서를 효시(嚆矢)로 한다”고 말했듯이, 중국 선학 사상사의 효시적인 책이다. 이 책은 스즈키 다이세쯔(鈴木大拙)나 중국의 호적(胡適)에도 영향을 미쳤다.
1905년 그는 중국에 존재했던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을 위경이라고 정의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敎外別傳, 拈華微笑, 正法眼藏, 涅槃妙心의 전거가 되는 경전으로 그 경전을 僞經이라고 부정한다는 것은 곧 선종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또 이 시기에 이슬람 연구나 양명학 연구에도 몰두해 이슬람의 성사 무함마드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1911년(메이지 44년)에는 조동종으로부터 유럽 종교 학술 시찰의 명을 받고 3년간 유학했다. 유럽 유학 도중 하와이에서 종교 시찰원으로 열흘을 머물렀고,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각지에서 불교 강연회를 실시했다. 1914년(다이쇼 3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일본 정부로부터 문학박사라는 칭호와 일본의 국가학위(國家學位)를 받았다.
누카리야 카이텐은 공직과 연구 두 분야에서 모두 충실했다. 가이텐의 제자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중국의 후스(胡適)와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에게 계승되어 ‘누카리야 불교학’으로 불리는 학파를 형성하기까지 이르렀다.
1929년 6월부터 8월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사찰의 사적과 고승들의 생애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많은 문헌들을 수집하여 고마자와대학(駒澤大?)에서 朝鮮禪敎史를 강의했고, 그 결과 1930년(64세)에『朝鮮禪敎史』(春秋社)가 출판되었다. 4년 후인 1934년(쇼화 9년)에 도쿄에서 강연하던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
1867년 동경에서 태어났다. 1893년(메이지 26년) 게이오기주쿠 대학(慶應義塾大?)?문학부(文?部) 졸업했다. 렌코지(連光寺) 제25대 주지(住職), 고마자와 대학(駒澤大?) 초대 학장(?長). 불교학(???), 동양 사상사(東洋思想史), 양명학(陽明?) 전공.
일본의 불교학자로 조동종의 승려이자 문학 박사이다. 도호(道號)는 불산(?山). 인도, 중국, 한국 선학(禪學) 사상사 등 동양 선학을 연구했고, 선불교를 내성 주관주의(?省主?主義)로 파악한 이른바 ‘누카리야 선학’(忽滑谷禪學), 누카리야파(忽滑谷派)라 불리는 선학(禪學) 사상을 확립했다.
1925년(59세) 조동종 대학(曹洞宗大學)이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으로 승격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인도와 중국 선학 사상사를 연구한『禪學思想史』(상권, 1923년, 하권, 1925년. 玄黃社)이다. 이 책은 그가 “선가(禪家)에는 아직 사상사가 없었다. 본서를 효시(嚆矢)로 한다”고 말했듯이, 중국 선학 사상사의 효시적인 책이다. 이 책은 스즈키 다이세쯔(鈴木大拙)나 중국의 호적(胡適)에도 영향을 미쳤다.
1905년 그는 중국에 존재했던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을 위경이라고 정의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敎外別傳, 拈華微笑, 正法眼藏, 涅槃妙心의 전거가 되는 경전으로 그 경전을 僞經이라고 부정한다는 것은 곧 선종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또 이 시기에 이슬람 연구나 양명학 연구에도 몰두해 이슬람의 성사 무함마드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1911년(메이지 44년)에는 조동종으로부터 유럽 종교 학술 시찰의 명을 받고 3년간 유학했다. 유럽 유학 도중 하와이에서 종교 시찰원으로 열흘을 머물렀고,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각지에서 불교 강연회를 실시했다. 1914년(다이쇼 3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일본 정부로부터 문학박사라는 칭호와 일본의 국가학위(國家學位)를 받았다.
누카리야 카이텐은 공직과 연구 두 분야에서 모두 충실했다. 가이텐의 제자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중국의 후스(胡適)와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에게 계승되어 ‘누카리야 불교학’으로 불리는 학파를 형성하기까지 이르렀다.
1929년 6월부터 8월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사찰의 사적과 고승들의 생애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많은 문헌들을 수집하여 고마자와대학(駒澤大?)에서 朝鮮禪敎史를 강의했고, 그 결과 1930년(64세)에『朝鮮禪敎史』(春秋社)가 출판되었다. 4년 후인 1934년(쇼화 9년)에 도쿄에서 강연하던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