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전도사 김종대(전 헌법재판관)의 『의역 난중일기』
50여 년의 공부 내공으로 이순신의 진면목을 더 깊이 찾아내다!
“수많은 난중일기가 세상에 나와 있지만 이순신을 공부하고 그의 정신을 따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순신의 생각에 가장 근접한 난중일기를 세상에 내놓을 필요가 있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나는 난중일기의 새로운 번역판인 『의역 난중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이 책의 의역자 김종대(전 헌법재판관)는 인생의 참스승으로 여긴 이순신 공부에 50여 년을 매진했다. 재판관 퇴임 후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슬픔과 분노에 잠겨 있을 때 이순신의 내면적 정신가치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결심을 곧바로 실천에 옮겨 서울, 부산, 여수에 ‘이순신 아카데미’를 열어 수많은 사회 지도층을 이순신 전도사로 양성했다. 그 여정에서 그는 난중일기를 사람마다 다르게 번역한 부분과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 직면하고 ‘보통의 이순신 공부인들이 함께, 쉽게 읽을 수 있는 난중일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수십 년간 일기를 써 온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여 이순신 삶의 진면목을 비춰볼 수 있는 난중일기의 의역을 시도했다. 한문에 능통한 한학자도,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도 아닌 그이지만 50여 년간 이순신을 참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내공의 깊이로 장군의 행적과 난중일기의 문면적 해석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이다.
『의역 난중일기』의 네 가지 특징
· 난중일기 원문과 함께 홍기문, 이은상, 노승석, 최두환 등이 쓴 번역본.
박기봉 편역의 『충무공 이순신 전서』(전 4권)를 두루 비교·참고해 집필.
· 해당 일기의 머리 부분에 매해, 매달 장군의 행적 간략히 서술.
· 문맥상 해설이 필요한 부분에 의역자 해설 첨가.
· 날짜는 관행대로 음력으로 표기했지만 현대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양력을 병기.
1월 진중 생활, 정월 첫 일기를 쓰다 27
2월 관할 5포를 순시하며 군비를 점검하다 33
3월 거북선을 진수(進水)하다 41
4월 조선 침공이 시작되다 48
5월 임진년 제1차 출전, 옥포에서 첫 승전하다 54
6월 제2차 출전, 네 번 승리하다 57
8월 부산대첩, 왜적의 본진을 격파하다 61
계사일기癸巳日記 1593
2월 왜적 소탕을 위해 웅천으로 가다 67
3월 한산도로 가 적을 칠 일을 궁리하다 78
5월 왜적, 이순신을 피하기에 급급하다 83
6월 진주성 함락의 비보를 듣다 96
7월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이진하다 109
8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120
9월 “견내량을 지켜 바다를 지켜 낼 것이다!” 129
갑오일기甲午日記 1594
1월 설에 곰내로 가 어머니를 뵙다 137
2월 제2차 당항포해전을 준비하다 148
3월 전투를 중지하라는 담종인의 ‘금토패문’에 항의하다 161
4월 진중 과거로 인재를 보충하다 170
5월 장마와 비바람을 견디다 177
6월 군사와 군량 확보에 애를 쓰다 185
7월 외교와 군무 처리에 나라 걱정이 태산이다 192
8월 원균과의 불화가 깊어지다 204
9월 수륙합동작전으로 장문포를 공격하다 213
10월 장문포 패전의 책임을 두고 장수들 간 불신이 깊어지다 222
11월 수군 장수로서의 일상이 지속되다 230
을미일기乙未日記 1595
1월 나라와 어머니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새다 241
2월 원균, 충청병사로 전출 가다 246
3월 바다를 지키는 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다 252
4월 즉각 출동이 가능하도록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다 259
5월 소금을 구워 군자금을 마련하다 266
6월 오랜 진중 생활, 장수와 군사의 건강이 위태롭다 274
7월 전쟁 장기화로 시름이 깊어지다 282
8월 촉석루에 올라 진주성전투 참패를 생각하며 통분해하다 290
9월 충청수사 선거이와 작별의 정을 나누다 297
10월 항왜(降倭)들을 시켜 불탄 대청과 다락방을 수리하다 304
11월 견내량을 지키며 적장의 움직임을 정탐하다 311
12월 청어를 잡아 곡식으로 바꾸고, 체찰사를 만나 군량 확보에 최선을 다하다 317
병신일기丙申日記 1596
1월 군량미를 마련하고 적을 경계하는 일상이 지속되다 325
2월 장기화된 강화협상으로 군기가 어지러워지다 335
3월 불편한 몸만큼 마음도 산란하다 346
4월 적의 우두머리 풍신수길이 사망했다는 헛소문을 듣다 357
5월 강화회담과 관계없이 바다 지키는 데 빈틈이 없다 364
6월 부하들과 매일 활을 쏘고 술도 자주 하다 373
7월 흉흉해지는 민심, 이몽학의 난을 한탄하다 380
8월 아픈 몸으로 전쟁 재발에 대비하다 388
윤8월 체찰사 배려로 어머니를 뵙다 396
9월 전라도를 순시하고 민심을 살피다 403
10월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수연을 베풀어 드리다 410
정유일기丁酉日記 1597
4월 감옥에서 나와 백의종군하던 중 어머니와 영이별하다 417
5월 초계의 권율 원수 막하로 가다 428
6월 모여곡에 거처를 잡고 한결같이 나라를 걱정하다 439
7월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 대패하다 454
8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명을 받다 468
9월 명량에서 크게 이기다 484
10월 아들 면을 잃고 절망하며 고하도에 진을 치다 499
11월 명량승첩 포상이 없어도 수군 재건에 최선을 다하다 511
12월 수군 재건에 심혈을 기울이다 519
무술일기戊戌日記 1598
1월 장수들과 모여 새해를 축원하다 529
9월 조명연합의 수군, 육군이 순천왜성을 공격하다 530
10월 뇌물 받은 유정 제독, 군사를 철수하다 534
11월 노량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결심하다 537
Author
이순신,김종대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