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만큼 살았다는 보통의 착각 (큰글자도서)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두려워지는 당신에게
$35.64
SKU
9791167780416
+ Wish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Wed 05/22 - Tue 05/28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Fri 05/17 - Tue 05/21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22/04/15
Pages/Weight/Size 181*266*20mm
ISBN 9791167780416
Categories 인문 > 주제로 읽는 인문학
Description
‘여든일곱의 현역’ 이근후,
그는 오늘도, 오늘보다 재미있는 내일이 기대된다


몇 년 전, 세상은 100세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우리는 새로운 역사에 처음 발을 내디딘 최초의 인류다. 이는 장수가 미덕인 나라에서 당연히 환영받을 만한 일인데, 어쩐지 사람들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모양새다.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삶에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점점 더 불안해지고 그 오랜 세월 뭐 해 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다. 굳이 불안의 원인을 찾자면, 아마도 그곳이 아직 가 보지 못한 먼 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곧 아흔을 바라보는 이근후의 삶과 철학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의 인생은 아직도 40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싱그럽고 찬란하다.

바야흐로 아흔, 곧 여든일곱에 접어드는 이 책의 저자 이근후는 20여 종의 책을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이화여대 명예교수이며 인기 유튜버로 활약하는 이 시대 인생 멘토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남은 생을 무엇을 하면서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인생을 앞서 겪어본’ 100세를 가까이 둔 사람의 이야기는 아마도 귀감을 넘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삶의 지침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Contents
서문 노년의 청춘 수업

1장 나이가 들기 전에 알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 깨달음이 주는 가치

흐름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오지 마세요│아내가 외출할 때 같이 가자고 하는 간 큰 남자│알콩 하면 달콩 한다면│노년은 그동안 모은 돈을 즐겨 쓰는 시기다│자녀는 부모의 보험이 아니다│‘건강이 최고다’라는 식상한 덕담?│좋은 기억을 상기시키면 치매 환자도 즐거울 수 있다│젊은이는 노인의 선생이다│노후를 위한 비자금

2장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믿음 · 나답게 산다는 것

굳이 초콜릿을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 쓸데없는 짓이다│당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라│비밀에 부쳐야 하는 인간관계는 맺지 않는 편이 좋다│행복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괴짜가 돼라│상황은 좋건 나쁘건 반드시 변한다│미래의 가족은 확대가족이 될 것이다│취미는 정신적인 비타민이다│유머는 정신 건강의 정점이다

3장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 좋은 삶을 결정짓는 태도

다른 사람 눈에 낀 티끌은 쉽게 보인다│의심은 망상으로 가는 첫 관문이다│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할 수 있다│숨을 깊이 들이쉬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쓸모없는 것들을 제거하라│그것은 네 문제다│삶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용서하라

4장 알지만, 알지 못하는 것들 · 나를 성장시키는 생각

아픔은 고통스럽지만 나를 성장시킨다│고통은 내면을 단련시키는 수단이다│인생에서 정말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진다│특별한 날을 위하여│화가 나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궁금증과 의심증은 다르다│인생은 내 인생이다│성장해 가는 노인이 성장을 멈춘 젊은이보다 낫다

5장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 내면의 자유를 위하여

현대인의 삶은 월부 인생이다│함께 울기는 쉬워도 함께 웃기는 어렵다│자녀들이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아도 괜찮다│유비무환도 안 통하는 것이 있다│준비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세월이 약이고 모르는 게 약이다│기적을 믿으라│질투는 자기 생애를 깍아 먹는 낭비다│노인이 되어도 이 일이 정말로 내게 중요할까?
Author
이근후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에서 1970년부터 2001년까지 강의했다. 대학 이외에도 평생교육원, 자비의 전화, 직접 설립한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소그룹 형식의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성상담, 사회복지, 청소년 교육, 심리학, 보건, 간호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해왔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도 한국 각계각층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창시절 6·25 전쟁을 치르고 가난한 와중에도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의 꿈을 키우던 중, 대학생 신분으로 4·19와 5·16 반대 시위에 참가해 감옥생활을 하는 바람에 학업과 구직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험은 오히려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반민주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고 당대 시대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키웠다.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병동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할 때 범국민적 인식 개선과 인권 강화를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 정부에서 실시한 전수조사에 참가하여 17개 정신병동을 탐방하고 강제수용시설과도 같은 열악한 환경에 처참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병동당 최하 1천 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의사도 없이 무분별하게 약물을 처방하는 데 놀라, 의사에 의한 약 처방을 위해 노력했고 해마다 점진적으로 시설 개선을 위해 애썼다. 1970년대 정신과 병동을 갖춘 대학병원이 전국에 고작 8곳이었고, 그중 5곳의 수용인원이 고작 20명이었다고 한다. 병동에는 오직 조현병 환자들이 가득하고, 정신과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공황이나 불안 같이 비교적 흔한 질환은 내과에서 약물만 처방받는 등,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우선 조현병 부모들의 모임을 만들어 환자에 대한 가족의 이해를 강조했고, 무분별한 약물 사용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활동했으며, 서대문구에 낮병동을 만들어 위급한 환자들이 내원하기 쉽게 시스템을 개선했다. 국립정신병원 재직 시에는 교과서에나 나오던 작업치료 개념을 도입하여 환자들이 활동도 않고 병상에 가만히 누워 도리어 병을 키우는 입원생활을 개선하고 아트 테라피, 화초 가꾸기, 간단한 육체활동 등을 입원생활에 도입했다.

교수라는 신분으로 학술논문 이외에는 집필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도 불구,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소한 칼럼을 집필했고, 정부적 요청이 있어 틈나는 대로 방송에도 출연해 정신건강에 대해 대중적으로 풀이하고 알렸다. 각종 편견과 오해를 줄여 나가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 일찍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국 성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해 성 문제라면 주로 산부인과 의사들이 생리적인 정보를 제공할 때도 ‘인구와 미래’라는 강의를 열고 청소년이 궁금증을 물어볼 수 있는 '아섹스' 사이트를 만들어 성 의식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

국내의 다채로운 활동 이외에도 등반가로서 네팔을 여행하던 것이 해외의료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네팔 무의촌 지역을 방문하였고 이대의료봉사단을 조직해 13년간 수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복지법인 광명보육원 이사로도 40년 넘게 활동하며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또 '예띠 시 낭송회'를 조직해 20년 넘게 문학회와 봉사 활동을 이끌었다.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통해 의학서를 번역하는 외에도 수필집 등 을 남겼는데 그중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는 큰 대중적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수석 졸업하면서 고령에 다시금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87세의 나이에도 장애인, 요양보호사 등의 도움으로 구술, 녹취 도움을 받아 이 책 《코끼리 만지는 인생》을 집필했다.

지치지 않는 왕성한 활동과 이타적인 삶의 비법을 묻자, '지나버린 것, 아직 닥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대신 지금 현재에 행복을 힘껏 누리라'고 조언한다. 또한 바쁜 가운데 사람들은 잊고 살지만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에서 1970년부터 2001년까지 강의했다. 대학 이외에도 평생교육원, 자비의 전화, 직접 설립한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소그룹 형식의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성상담, 사회복지, 청소년 교육, 심리학, 보건, 간호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해왔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도 한국 각계각층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창시절 6·25 전쟁을 치르고 가난한 와중에도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의 꿈을 키우던 중, 대학생 신분으로 4·19와 5·16 반대 시위에 참가해 감옥생활을 하는 바람에 학업과 구직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험은 오히려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반민주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고 당대 시대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키웠다.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병동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할 때 범국민적 인식 개선과 인권 강화를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 정부에서 실시한 전수조사에 참가하여 17개 정신병동을 탐방하고 강제수용시설과도 같은 열악한 환경에 처참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병동당 최하 1천 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의사도 없이 무분별하게 약물을 처방하는 데 놀라, 의사에 의한 약 처방을 위해 노력했고 해마다 점진적으로 시설 개선을 위해 애썼다. 1970년대 정신과 병동을 갖춘 대학병원이 전국에 고작 8곳이었고, 그중 5곳의 수용인원이 고작 20명이었다고 한다. 병동에는 오직 조현병 환자들이 가득하고, 정신과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공황이나 불안 같이 비교적 흔한 질환은 내과에서 약물만 처방받는 등,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우선 조현병 부모들의 모임을 만들어 환자에 대한 가족의 이해를 강조했고, 무분별한 약물 사용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활동했으며, 서대문구에 낮병동을 만들어 위급한 환자들이 내원하기 쉽게 시스템을 개선했다. 국립정신병원 재직 시에는 교과서에나 나오던 작업치료 개념을 도입하여 환자들이 활동도 않고 병상에 가만히 누워 도리어 병을 키우는 입원생활을 개선하고 아트 테라피, 화초 가꾸기, 간단한 육체활동 등을 입원생활에 도입했다.

교수라는 신분으로 학술논문 이외에는 집필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도 불구,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소한 칼럼을 집필했고, 정부적 요청이 있어 틈나는 대로 방송에도 출연해 정신건강에 대해 대중적으로 풀이하고 알렸다. 각종 편견과 오해를 줄여 나가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 일찍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국 성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해 성 문제라면 주로 산부인과 의사들이 생리적인 정보를 제공할 때도 ‘인구와 미래’라는 강의를 열고 청소년이 궁금증을 물어볼 수 있는 '아섹스' 사이트를 만들어 성 의식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

국내의 다채로운 활동 이외에도 등반가로서 네팔을 여행하던 것이 해외의료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네팔 무의촌 지역을 방문하였고 이대의료봉사단을 조직해 13년간 수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복지법인 광명보육원 이사로도 40년 넘게 활동하며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또 '예띠 시 낭송회'를 조직해 20년 넘게 문학회와 봉사 활동을 이끌었다.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통해 의학서를 번역하는 외에도 수필집 등 을 남겼는데 그중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는 큰 대중적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수석 졸업하면서 고령에 다시금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87세의 나이에도 장애인, 요양보호사 등의 도움으로 구술, 녹취 도움을 받아 이 책 《코끼리 만지는 인생》을 집필했다.

지치지 않는 왕성한 활동과 이타적인 삶의 비법을 묻자, '지나버린 것, 아직 닥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대신 지금 현재에 행복을 힘껏 누리라'고 조언한다. 또한 바쁜 가운데 사람들은 잊고 살지만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