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의 철학과 가치관이 담긴 생애 마지막 걸작 「템페스트」
폭풍우와 함께 외딴 섬의 마법처럼 펼쳐지는 인생사의 희로애락
시카고 플랜이란?
이름 없는 사립대학에 불과했던 시카고 대학을 명문 학교의 반열에 오르게 한 ‘시카고플랜(Chicago Plan)’. 1929년 시카고 대학 제5대 총장으로 취임한 로버트 호킨스(Robert Maynard Hutchins)가 추진한 ‘시카고플랜’은 그가 잘 알고 있던 ‘존 스튜어트 밀’식의 독서법을 따른 것으로 ‘철학 고전을 비롯한 세계의 위대한 고전 100권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지 않은 학생은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라는 고전 철학 독서교육 프로그램이다.
호킨스 총장은 학생들에게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제를 주었다.
첫째, 모델을 정하라:너에게 가장 알맞은 모델을 한 명 골라라
둘째, 영원불변한 가치를 발견하라:인생의 모토가 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라
셋째, 발견한 가치에 대하여 꿈과 비전을 가져라
그는 학생들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삶의 지표를 설정할 것을 강조했다. 즉, 자신의 롤 모델의 선정, 불변하는 가치의 발견, 꿈과 비전의 개발의 필요성을 권유한 것이다.
Contents
인물관계도 및 등장인물 * 7
제1막 * 9
제2막 * 39
제3막 * 69
제4막 * 99
제5막 * 127
옮긴이의 글 * 156
몰리에르 연보 * 162
Author
몰리에르,김보희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배우다. 파리에서 출생했으며 1622년 1월 15일 장 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644년 6월 28일자로 예명 몰리에르를 사용하며 연극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후 그는 30년 동안 오직 연극만을 위해 전력투구하다가 51세 때 공연 도중에 죽음을 맞이했다. 서양 중세를 거치며 비극에 비해 열등한 장르로 간주되던 희극의 미학적 가치를 제고해 근대적 의미에서 희극의 위상을 정립했다. 영국인들이 영어를 셰익스피어의 언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어를 몰리에르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몰리에르의 희극에는 프랑스 고유의 정서와 문화가 마술 같은 언어로 녹아들어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연극에 빠져들었던 몰리에르는 13년의 유랑 극단 생활을 거치며 유럽 근대의 여명기에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삶을 경험했다. 유랑을 마치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파리 연극계로 재입성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수많은 시기와 모함에 맞서야 했다. 그는 52세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40대 초반에 발병한 폐질환에 시달렸지만 한순간도 웃음을 놓지 않았다. 이 위대한 희극 작가의 작품들은 300년이 넘도록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삶의 울림이 있는 웃음을 선사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웃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삶이 주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의 초기 연극 활동은 지방에서 이뤄졌으며, 그의 이름으로 알려진 최초의 작품으로는, 리옹에서 공연된 「경솔한 사람」(1655)과 베지에에서 공연된 「애정 다툼」(1656) 등을 꼽을 수 있다. 극작가 몰리에르의 명성은 그의 극단이 1658년 10월 24일 옛 루브르 궁전의 근위대 처소에 마련된 가설무대에서 루이 14세와 궁정을 위해 공연한 코르네유의 「니코메드」와 그 자신의 작품 「사랑에 빠진 의사」를 통해서 확고해졌다. 마침내 1662년 12월 26일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아내들의 학교」와, 1664년 5월 첫 번째 「타르튀프」 공연은 그를 격랑과 추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어서 그는 「동 쥐앙」(1665)을 무대에 올려 사태를 가일층 격화시켰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배우다. 파리에서 출생했으며 1622년 1월 15일 장 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644년 6월 28일자로 예명 몰리에르를 사용하며 연극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후 그는 30년 동안 오직 연극만을 위해 전력투구하다가 51세 때 공연 도중에 죽음을 맞이했다. 서양 중세를 거치며 비극에 비해 열등한 장르로 간주되던 희극의 미학적 가치를 제고해 근대적 의미에서 희극의 위상을 정립했다. 영국인들이 영어를 셰익스피어의 언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어를 몰리에르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몰리에르의 희극에는 프랑스 고유의 정서와 문화가 마술 같은 언어로 녹아들어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연극에 빠져들었던 몰리에르는 13년의 유랑 극단 생활을 거치며 유럽 근대의 여명기에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삶을 경험했다. 유랑을 마치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파리 연극계로 재입성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수많은 시기와 모함에 맞서야 했다. 그는 52세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40대 초반에 발병한 폐질환에 시달렸지만 한순간도 웃음을 놓지 않았다. 이 위대한 희극 작가의 작품들은 300년이 넘도록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삶의 울림이 있는 웃음을 선사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웃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삶이 주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의 초기 연극 활동은 지방에서 이뤄졌으며, 그의 이름으로 알려진 최초의 작품으로는, 리옹에서 공연된 「경솔한 사람」(1655)과 베지에에서 공연된 「애정 다툼」(1656) 등을 꼽을 수 있다. 극작가 몰리에르의 명성은 그의 극단이 1658년 10월 24일 옛 루브르 궁전의 근위대 처소에 마련된 가설무대에서 루이 14세와 궁정을 위해 공연한 코르네유의 「니코메드」와 그 자신의 작품 「사랑에 빠진 의사」를 통해서 확고해졌다. 마침내 1662년 12월 26일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아내들의 학교」와, 1664년 5월 첫 번째 「타르튀프」 공연은 그를 격랑과 추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어서 그는 「동 쥐앙」(1665)을 무대에 올려 사태를 가일층 격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