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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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0/09/29
Pages/Weight/Size 152*224*40mm
ISBN 9791165342296
Categories 사회 정치 > 여성/젠더
Description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제도화된 남성 중심 지배 이데올로기인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교묘한 형태로 “내면의 식민화”에 빠지게 된다고 진단하며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끈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 초판 출간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국 독자를 찾아왔다. 이 책은 ‘정치’를 정당을 중심으로 한 협소한 개념으로 보지 않고 “권력으로 구조화된 관계와 배치”로 정의해 가부장제에서 성(性)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분석했다. 이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여성 참정권을 쟁취한 이후 반동적 상황을 겪으며 두 번째 페미니즘 운동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난 당시 미국의 상황은 일견 현재 한국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하다. 밀렛의 말처럼 호주제 폐지와 함께 표면적으로는 “성차별이 해소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가부장제는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이자 “근본적인 권력 개념”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혁명의 전투장은 인간 제도라기보다 의식”이기 때문이다. 2009년 출간되었던 한국어판이 절판된 후에도 많은 독자가 애타게 찾으며 재출간되기를 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성 정치학』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읽히고 있다. 밀렛은 2017년 9월 세상을 떠났지만, 가부장제를 향한 도전의 메시지는 지금도 이 책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가부장제의 위험과 억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미래는 가부장제를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 여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말이다.”(15쪽, 2000년 일리노이 출판사 서문 중에서)



Contents
서문 - 일리노이 출판사(2000)
서문 - 터치스톤 출판사(1990)
초판 서문 - 더블데이 출판사(1970)

1부 성 정치학

- 01 성 정치학의 사례들
- 02 성 정치학의 이론

2부 역사적 배경

- 03 성 혁명 제1기: 1830~1930
- 04 성 혁명 반동기: 1930~1960

3부 문학적 고찰

- 05 D. H. 로렌스
- 06 헨리 밀러
- 07 노먼 메일러
- 08 장 주네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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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케이트 밀렛,김유경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운동의 원동력이 된 기념비적인 저작 《성 정치학》의 저자. 동성애자, 정신 질환자, 노인, 정치적 억압에 의한 희생자의 복종을 폭로하기도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겸 예술가이기도 하다.

케이트 밀렛은 1956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1958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여자 단과 대학 세인트 힐다스 칼리지에서 미국 여성 최초로 1등급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와세다 대학교, 브린마워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배우자였던 후미오 요시무라의 말처럼 “매우 평범한 미국 자유주의자”였던 케이트 밀렛은 1964년에서 1965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여성은 해방되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에 참석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1966년부터는 전미 여성 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에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8년,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바너드 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강의를 하던 케이트 밀렛은 컬럼비아 대학교 점거 사건 당시 학생들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그해 12월 해고 당하고 만다. 밀렛은 한순간에 수입원이 사라진 데다 대학의 부당한 처우와 차별을 겪으며 좌절했지만, “조각하듯 글을 쓰기로, 재미 삼아 한번 놀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1969년, 현대 영미 소설 비평을 통해 철학, 종교, 과학 등 다양한 분야와 제도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부장제를 파헤쳐 훗날 ‘최초의 페미니즘 문예 비평’으로 평가될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밀렛은 결혼을 중심으로 한 남녀의 관계를 사랑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규정하고, 남녀 사이의 내밀한 영역인 성관계에서조차 여성은 가부장 권력 아래 “내면의 식민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미국 여성 참정권 선포 50주년이던 1970년, 더블데이가 출간한 《성 정치학》은 금세 1만 부가 판매되었고, 연말까지 8만여 부가 판매되었다. 《뉴욕타임스》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케이트 밀렛을 “페미니스트 운동의 대제사장”이라고 불렀다. 여성 운동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1970년 8월 31일 발행된 《타임》에서는 밀렛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으로 칭하며 그의 초상화로 표지를 장식했다. 밀렛의 논문을 지도한 조지 스테이드 교수는 “호두까기 인형에 고환이 물린 채 앉아 있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라는 말로 《성 정치학》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메시지의 충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성 정치학》은 케이트 밀렛에게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이러한 관심에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기원에 의문을 제기한 밀렛에게 전통적인 이성애적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저명한 비평가 어빙 하우는 “이른바 시대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을 대충 어지럽게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면서 “배운 티를 내려 애쓰고 있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결정적으로 레즈비언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운동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197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 도중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부터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밀렛은 힘겹게 “레즈비언”이라고 답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이라며 치켜세웠던 《타임》은 “페미니스트들을 레즈비언으로 치부하는 회의론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밀렛의 고백 이후 많은 진보적 페미니스트가 등을 돌렸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 운동이 동력을 상실하면서 《성 정치학》은 절판되어 한동안 구할 수 없었다. 케이트 밀렛은 2000년에 쓴 서문에서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실종된 것 같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연구가 진행되면서 밀렛과 《성 정치학》 또한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 밀렛은 2012년 오노 요코가 제정한 ‘용기 있는 예술인상’을 받았고, 2013년에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후 케이트 밀렛은 2017년 9월 6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운동의 원동력이 된 기념비적인 저작 《성 정치학》의 저자. 동성애자, 정신 질환자, 노인, 정치적 억압에 의한 희생자의 복종을 폭로하기도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겸 예술가이기도 하다.

케이트 밀렛은 1956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1958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여자 단과 대학 세인트 힐다스 칼리지에서 미국 여성 최초로 1등급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와세다 대학교, 브린마워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배우자였던 후미오 요시무라의 말처럼 “매우 평범한 미국 자유주의자”였던 케이트 밀렛은 1964년에서 1965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여성은 해방되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에 참석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1966년부터는 전미 여성 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에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8년,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바너드 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로 강의를 하던 케이트 밀렛은 컬럼비아 대학교 점거 사건 당시 학생들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그해 12월 해고 당하고 만다. 밀렛은 한순간에 수입원이 사라진 데다 대학의 부당한 처우와 차별을 겪으며 좌절했지만, “조각하듯 글을 쓰기로, 재미 삼아 한번 놀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1969년, 현대 영미 소설 비평을 통해 철학, 종교, 과학 등 다양한 분야와 제도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부장제를 파헤쳐 훗날 ‘최초의 페미니즘 문예 비평’으로 평가될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밀렛은 결혼을 중심으로 한 남녀의 관계를 사랑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규정하고, 남녀 사이의 내밀한 영역인 성관계에서조차 여성은 가부장 권력 아래 “내면의 식민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미국 여성 참정권 선포 50주년이던 1970년, 더블데이가 출간한 《성 정치학》은 금세 1만 부가 판매되었고, 연말까지 8만여 부가 판매되었다. 《뉴욕타임스》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케이트 밀렛을 “페미니스트 운동의 대제사장”이라고 불렀다. 여성 운동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1970년 8월 31일 발행된 《타임》에서는 밀렛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으로 칭하며 그의 초상화로 표지를 장식했다. 밀렛의 논문을 지도한 조지 스테이드 교수는 “호두까기 인형에 고환이 물린 채 앉아 있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라는 말로 《성 정치학》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메시지의 충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성 정치학》은 케이트 밀렛에게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이러한 관심에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기원에 의문을 제기한 밀렛에게 전통적인 이성애적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저명한 비평가 어빙 하우는 “이른바 시대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을 대충 어지럽게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면서 “배운 티를 내려 애쓰고 있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결정적으로 레즈비언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운동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197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 도중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부터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밀렛은 힘겹게 “레즈비언”이라고 답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이라며 치켜세웠던 《타임》은 “페미니스트들을 레즈비언으로 치부하는 회의론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밀렛의 고백 이후 많은 진보적 페미니스트가 등을 돌렸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 운동이 동력을 상실하면서 《성 정치학》은 절판되어 한동안 구할 수 없었다. 케이트 밀렛은 2000년에 쓴 서문에서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실종된 것 같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연구가 진행되면서 밀렛과 《성 정치학》 또한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 밀렛은 2012년 오노 요코가 제정한 ‘용기 있는 예술인상’을 받았고, 2013년에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후 케이트 밀렛은 2017년 9월 6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