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중학’은 조선시대 낙동강 중류 지역의 유학을 일컫는 말로, 조선시대 영남유학을 지나치게 낙동강 상류 이황의 퇴계학과 낙동강 하류 조식의 남명학 둘로 나눠보는 관점에서 오는 한계점과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주문팔현(洲門八賢)’은 조선 말 성리학의 대가이자 ‘낙중학’을 부흥시킨 한주 이진상(1818~1886)의 대표적인 여덟 제자를 흔히 일컫는 말이다. 이진상의 「문인록(門人錄)」에는 총 137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는 38세 때 처음으로 강학을 시작하여 주로 낙동강 중류와 하류 일대의 유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었다. ‘주문팔현’의 경우, 그가 53세 봄 후산 허유(1833~1904)가 맨 먼저 급문(及門)했으며, 이해 겨울에 면우 곽종석(1846~1919)이, 55세 때 자동 이정모(1846~1875)가, 58세 때 홍와 이두훈(1856~1918)이, 59세 때 교우 윤주하(1846~1906)가, 마지막으로 61세 때 회당 장석영(1851~1926)과 물천 김진호(1845~1908)가 급문했다. ‘주문팔현’에는 위에서 말한 7명에 더해 그의 아들 한계 이승희(1847~1916)가 포함되어 있다.
‘주문팔현’을 중심으로 한 한주학파는 대한제국을 전후한 시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그 영역이 낙동강 중하류 지역뿐만 아니라 영남 일대 나아가 중앙과 해외에까지 미치고, 재전제자들이 다시 이를 이어받음으로써 명실공이 당대 최고, 최대의 학파적 형세를 이루었다. 먼저 ‘주문팔현’은 이진상 사후 그의 저술 편찬에 나섰으며, 낙상의 퇴계학 정통 계승론자들로부터 스승의 학설이 비판과 배척을 받게 되자 일제히 이를 옹호하는 데 나섰다. 그들은 을미사변(1895) 후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직시하는 가운데 척사위정론의 입장에서 벗어나 개명한 유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에 그들은 의병에 참여하지 않고 만국공법에 호소하는 길을 택했으며, 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승희는 일제강점 직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진상의 한주학을 바탕으로 공자교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Contents
책을 펴내며 / 5
· 총론 / 홍원식
1. 머리말 _ 14
2. 이진상의 한주학과 ‘주문팔현’ _ 15
3. 이진상의 성리설 계승과 옹호 _ 19
4. 현실 인식의 변화와 다양한 활동 _ 21
5. 맺음말 _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