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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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4/06/01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91164161621
Categories 인문 > 인문/교양
Description
“당신은 잘못 살지 않았다”
90세 정신과 의사 이근후가 말하는 ‘삶을 긍정하는 법’

‘돈이 부족하다. 더 열심히 벌었어야 했다.’
‘바쁘게 사느라 나를 돌보지 못했다.’
‘가족도, 친구도 남아 있지 않다. 혼자라고 느낀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생각하며 잠시 멈춰보니 후회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루하루는 바쁘게 돌아가고 일상을 버티기에 급급하다. 어설픈 위로나 응원은 공허하게 들리는데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청춘이라 부르지는 못하지만 아직은 한참을 더 달려야 하는 나이. 산다는 것은 원래 이런 것일까.

수십 년을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상담해온 아흔의 노교수에게도 인생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끝에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면, 그 삶이 어떠하든 당신은 잘못 살지 않았다.”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고, 커서는 사회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하지만 오로지 타인의 기준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나를 잊게 된다.

이근후 교수는 ‘내 인생에는 더 기대할 게 없다’고 말하는 이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전하려 이 책을 썼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을 넘기며 했던 고민들이 지나고 보니 얼마나 사소한 문제였는지, 그리고 삶을 진짜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살폈다. 나를 증명하지 않고 긍정하는 법을 깨닫는 순간 내게 남은 시간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축복이 된다.
Contents
들어가며│벌써 90년, 아직 90년

석가에게 의사가 있었더라면
모두 내 탓이었네
이 나이에도 모르는 것
나는 누구인가
인연이 무엇이기에
아기의 소망
내 말 좀 들어주오
죽음 앞에서 담담한 사람이 있을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기적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는 법
늙었다고 해서 다 노망은 아니라오
내가 다 애정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야
안 되는 일을 받아들이기란
죽자고 열심히 하면 죽는다
나에게 마지막 남아 있는 정체성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미쳐버린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사는 법
죽고 싶은 마음
고독에 깔려 죽지 않는 법
Author
이근후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에서 1970년부터 2001년까지 강의했다. 대학 이외에도 평생교육원, 자비의 전화, 직접 설립한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소그룹 형식의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성상담, 사회복지, 청소년 교육, 심리학, 보건, 간호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해왔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도 한국 각계각층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창시절 6·25 전쟁을 치르고 가난한 와중에도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의 꿈을 키우던 중, 대학생 신분으로 4·19와 5·16 반대 시위에 참가해 감옥생활을 하는 바람에 학업과 구직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험은 오히려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반민주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고 당대 시대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키웠다.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병동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할 때 범국민적 인식 개선과 인권 강화를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 정부에서 실시한 전수조사에 참가하여 17개 정신병동을 탐방하고 강제수용시설과도 같은 열악한 환경에 처참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병동당 최하 1천 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의사도 없이 무분별하게 약물을 처방하는 데 놀라, 의사에 의한 약 처방을 위해 노력했고 해마다 점진적으로 시설 개선을 위해 애썼다. 1970년대 정신과 병동을 갖춘 대학병원이 전국에 고작 8곳이었고, 그중 5곳의 수용인원이 고작 20명이었다고 한다. 병동에는 오직 조현병 환자들이 가득하고, 정신과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공황이나 불안 같이 비교적 흔한 질환은 내과에서 약물만 처방받는 등,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우선 조현병 부모들의 모임을 만들어 환자에 대한 가족의 이해를 강조했고, 무분별한 약물 사용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활동했으며, 서대문구에 낮병동을 만들어 위급한 환자들이 내원하기 쉽게 시스템을 개선했다. 국립정신병원 재직 시에는 교과서에나 나오던 작업치료 개념을 도입하여 환자들이 활동도 않고 병상에 가만히 누워 도리어 병을 키우는 입원생활을 개선하고 아트 테라피, 화초 가꾸기, 간단한 육체활동 등을 입원생활에 도입했다.

교수라는 신분으로 학술논문 이외에는 집필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도 불구,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소한 칼럼을 집필했고, 정부적 요청이 있어 틈나는 대로 방송에도 출연해 정신건강에 대해 대중적으로 풀이하고 알렸다. 각종 편견과 오해를 줄여 나가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 일찍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국 성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해 성 문제라면 주로 산부인과 의사들이 생리적인 정보를 제공할 때도 ‘인구와 미래’라는 강의를 열고 청소년이 궁금증을 물어볼 수 있는 '아섹스' 사이트를 만들어 성 의식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

국내의 다채로운 활동 이외에도 등반가로서 네팔을 여행하던 것이 해외의료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네팔 무의촌 지역을 방문하였고 이대의료봉사단을 조직해 13년간 수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복지법인 광명보육원 이사로도 40년 넘게 활동하며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또 '예띠 시 낭송회'를 조직해 20년 넘게 문학회와 봉사 활동을 이끌었다.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통해 의학서를 번역하는 외에도 수필집 등 을 남겼는데 그중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는 큰 대중적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수석 졸업하면서 고령에 다시금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87세의 나이에도 장애인, 요양보호사 등의 도움으로 구술, 녹취 도움을 받아 이 책 《코끼리 만지는 인생》을 집필했다.

지치지 않는 왕성한 활동과 이타적인 삶의 비법을 묻자, '지나버린 것, 아직 닥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대신 지금 현재에 행복을 힘껏 누리라'고 조언한다. 또한 바쁜 가운데 사람들은 잊고 살지만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에서 1970년부터 2001년까지 강의했다. 대학 이외에도 평생교육원, 자비의 전화, 직접 설립한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소그룹 형식의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정신의학뿐만 아니라, 성상담, 사회복지, 청소년 교육, 심리학, 보건, 간호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해왔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도 한국 각계각층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창시절 6·25 전쟁을 치르고 가난한 와중에도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의 꿈을 키우던 중, 대학생 신분으로 4·19와 5·16 반대 시위에 참가해 감옥생활을 하는 바람에 학업과 구직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험은 오히려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반민주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고 당대 시대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키웠다.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병동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할 때 범국민적 인식 개선과 인권 강화를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 정부에서 실시한 전수조사에 참가하여 17개 정신병동을 탐방하고 강제수용시설과도 같은 열악한 환경에 처참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병동당 최하 1천 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의사도 없이 무분별하게 약물을 처방하는 데 놀라, 의사에 의한 약 처방을 위해 노력했고 해마다 점진적으로 시설 개선을 위해 애썼다. 1970년대 정신과 병동을 갖춘 대학병원이 전국에 고작 8곳이었고, 그중 5곳의 수용인원이 고작 20명이었다고 한다. 병동에는 오직 조현병 환자들이 가득하고, 정신과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공황이나 불안 같이 비교적 흔한 질환은 내과에서 약물만 처방받는 등,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우선 조현병 부모들의 모임을 만들어 환자에 대한 가족의 이해를 강조했고, 무분별한 약물 사용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활동했으며, 서대문구에 낮병동을 만들어 위급한 환자들이 내원하기 쉽게 시스템을 개선했다. 국립정신병원 재직 시에는 교과서에나 나오던 작업치료 개념을 도입하여 환자들이 활동도 않고 병상에 가만히 누워 도리어 병을 키우는 입원생활을 개선하고 아트 테라피, 화초 가꾸기, 간단한 육체활동 등을 입원생활에 도입했다.

교수라는 신분으로 학술논문 이외에는 집필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도 불구,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소한 칼럼을 집필했고, 정부적 요청이 있어 틈나는 대로 방송에도 출연해 정신건강에 대해 대중적으로 풀이하고 알렸다. 각종 편견과 오해를 줄여 나가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 일찍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국 성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해 성 문제라면 주로 산부인과 의사들이 생리적인 정보를 제공할 때도 ‘인구와 미래’라는 강의를 열고 청소년이 궁금증을 물어볼 수 있는 '아섹스' 사이트를 만들어 성 의식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

국내의 다채로운 활동 이외에도 등반가로서 네팔을 여행하던 것이 해외의료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네팔 무의촌 지역을 방문하였고 이대의료봉사단을 조직해 13년간 수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복지법인 광명보육원 이사로도 40년 넘게 활동하며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또 '예띠 시 낭송회'를 조직해 20년 넘게 문학회와 봉사 활동을 이끌었다.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통해 의학서를 번역하는 외에도 수필집 등 을 남겼는데 그중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는 큰 대중적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수석 졸업하면서 고령에 다시금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87세의 나이에도 장애인, 요양보호사 등의 도움으로 구술, 녹취 도움을 받아 이 책 《코끼리 만지는 인생》을 집필했다.

지치지 않는 왕성한 활동과 이타적인 삶의 비법을 묻자, '지나버린 것, 아직 닥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대신 지금 현재에 행복을 힘껏 누리라'고 조언한다. 또한 바쁜 가운데 사람들은 잊고 살지만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