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정약용 말꽃모음 (큰글씨책)

$32.40
SKU
9791163500520
+ Wish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Tue 04/29 - Mon 05/5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Thu 04/24 - Mon 04/28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21/12/30
Pages/Weight/Size 210*297*20mm
ISBN 9791163500520
Categories 인문 > 인문/교양
Description
이 책은 엮은이 설흔이 ‘좋아하는’ 정약용의 글을 본인의 방식대로 읽고 만난 결과물이다. 정약용은 18년의 유배 기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쓴 대학자이다. 그가 쓴 책들은 『흠흠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조선 말기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위대한 저서’라고는 할 수 있지만 일반인이 편하고 쉽게 접근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엮은이 또한 ‘정약용’ 하면 ‘학자’로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딱딱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며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젊은 시절의 정약용이 쓴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엔 세검정에 가자(游洗劍亭記)’, ‘죽란시사를 결성하며(竹欄詩社帖序)’라는 두 편의 글을 읽고는 정약용에 대해 새롭게 느꼈다.

엮은이는 이 두 글에 대해 ‘용맹과 진취, 사랑과 아취가 흘러넘치는…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문장가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글’이라고 평가하며 ‘정약용’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사람의 일생을 젊음(미성숙함)과 늙음(성숙함)으로 나누는 것은 도식적이고 위험한 일이지만, 엮은이는 유배 이전 정약용이 쓴 글들을 다루며 ‘젊은 정약용’의 글이라 이름을 붙였다. 설흔이 만난 젊은 정약용은 “진취적이고 뜻이 높고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 다른 한편으로는 놀기 좋아하고 우정에 목숨을 걸고 쉽게 분노하고 좌절하는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갖고 있으나 그 가능성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하고 가슴속에 숨어 있을 뿐”인 우리가 그간 알지 못했던 사람 냄새 나는 인물 정약용이다. 147개의 말꽃이 담긴『젊은 정약용 말꽃모음』은 다음과 같이 11장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Contents
01 소년 1 - 10
02 세상으로 나아가다 11 - 21
03 빛과 기쁨 22 - 36
04 인생의 스승 37 - 56
05 가족 57 - 65
06 삶의 원칙, 그리고 책 66 - 87
07 삶의 여백, 그리고 쓸쓸함 88 - 109
08 세상의 참모습 110 - 119
09 어둠과 슬픔 120 - 135
10 천주교 136 - 139
11 젊음의 끝 140 - 147
Author
정약용,설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