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 산문집

저 천명을 즐김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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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11/25
Pages/Weight/Size 148*210*18mm
ISBN 9791160871036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중국 고전 문학의 대표 문인 도연명,
지조를 지키며 현실적 고뇌의 초월을 그리다


도연명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인 동진(東晉)에서 송(宋)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살면서 자신의 개성과 지조를 곧게 견지했던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유가적 소양을 닦았고 전원으로 돌아간 후에는 도가적 가르침을 생활 속에 실천하였는데, 특히 장자(莊子)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도연명은 소요유(逍遙遊)의 경지이자 삶의 터전인 전원에서 직접 농사지으면서 도가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고 그 감회와 깨달음을 시문(詩文)으로 형상화해 내었다. 이후 그의 삶과 그가 남긴 작품은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성을 잃지 않고 참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하였다.

『문선(文選)』을 엮은 것으로 유명한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 501-531)은 도연명이 죽고 100여 년이 지난 뒤에 도연명의 시문을 모으고 교감하여 『도연명집(陶淵明集)』을 편찬하였다. 그 내력을 기록한 「서문」에서 그는, “도연명의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치달리며 다투는 마음이 버려지고 천박하고 인색한 뜻이 사라질 것이며, 탐욕스런 자가 청렴해질 수 있고 나약한 자가 뜻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有能觀淵明之文者, 馳競之情遣, 鄙吝之意祛, 貪夫可以廉, 懦夫可以立.)”라고 하였다. 도연명의 글이 물욕에 이끌려 길을 헤매는 이들에게 앞길을 비춰주는 빛이 될 것임을 선언한 말이다.

도연명이 남긴 산문은 13편이 전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도화원기(桃花源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등 주옥같은 명편들이 있다. 그가 팽택현(彭澤縣)의 현령 자리를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간 뒤에 그간의 사정과 당시의 심경, 장래의 각오 등을 서술한 「귀거래혜사」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는 불후의 명작이다. 도연명은 이 글에서 밝힌 지향을 평생토록 추구하였고 실천하였으니, 자기 자신의 ‘좌우명(座右銘)’과 같은 글이라고 하겠다.
Contents
머리말

1.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부와 서문

-「감사불우부 병서(感士不遇賦 幷序)」
관련 작품 1: 동중서(董仲舒) 「사불우부(士不遇賦)」
관련 작품 2: 사마천(司馬遷) 「비사불우부(悲士不遇賦)」

2. 감정을 가라앉히는 부와 서문

-「한정부 병서(閑情賦 幷序)」
관련 작품 1: 장형(張衡) 「정정부(定情賦)」
관련 작품 2: 채옹(蔡邕) 「정정부(靜情賦)」

3. ‘돌아가리라’의 사와 서문

-「귀거래혜사 병서(歸去來兮辭 幷序)」
관련 작품 1: 장형(張衡) 「귀전부(歸田賦)」
관련 작품 2: 소식(蘇軾)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
관련 작품 3: 이인로(李仁老)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
관련 작품 4: 이색(李穡) 「독귀거래사(讀歸去來辭)」

4. 복숭아꽃이 핀 수원(水源)의 기문

-「도화원기(桃花源記)」
관련 작품 1: 도연명(陶淵明) 「도화원시(桃花源詩)」
관련 작품 2: 왕안석(王安石) 「도원행(桃源行)」
관련 작품 3: 진화(陳?) 「도원가(桃源歌)」

5. 진나라 정서대장군의 장사(長史)를 지낸, 돌아가신 맹부군(孟府君) 전기

-「진고정서대장군장사맹부군전(晋故征西大將軍長史孟府君傳)」

6. 오류선생 전기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관련 작품: 백거이(白居易) 「방도공구택 병서(訪陶公舊宅 幷序)」

7. 사기를 읽고 나서 지은 9편

-「독사술 9장(讀史述 九章)」
관련 작품: 도연명(陶淵明) 「음주(飮酒)」 제2수

8. 부채 위의 그림에 부치는 찬양

-「선상화찬(扇上畵贊)」
관련 작품: 도연명(陶淵明) 「권농(勸農)」

9. 상장과 금경에 대한 찬양

-「상장금경찬(尙長禽慶贊)」

10. 아들 엄 등에게 주는 글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
관련 작품 1: 도연명(陶淵明) 「책자(責子)」
관련 작품 2: 도연명(陶淵明) 「명자(命子)」

11. 정씨에게 시집간 누이동생에 대한 제문

-「제정씨매문(祭程氏妹文)」

12. 사촌동생 경원(敬遠)에 대한 제문

-「제종제경원문(祭從弟敬遠文)」
관련 작품: 도연명(陶淵明) 「계묘세십이월중작여종제경원(癸卯歲十二月中作與從弟敬遠)」

13. 나 자신에 대한 제문

-「자제문(自祭文)」
관련 작품: 도연명(陶淵明) 「만가시(挽歌詩)」 3수

부록
1. 「도징사뢰 병서(陶徵士? 幷序)」 안연지(顔延之)
2. 「도연명집서(陶淵明集序)」 소통(蕭統)
3. 「도연명전(陶淵明傳)」 소통(蕭統)
4. 『송서(宋書)·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 심약(沈約)
5. 『진서(晉書)·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 방현령(房玄齡)
6. 『남사(南史)·은일전(隱逸傳)·도잠(陶潛)』 이연수(李延壽)

참고문헌
Author
도연명,김창환
도연명(陶淵明)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심약(沈約)의 『송서(宋書)』에 근거해 도연명의 향년을 63세로 보았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참고할 때 최근 위안싱페이 교수가 주장한 76세설이 가장 타당하다. 도연명은 영화(永和) 8년, 서기 352년에, 현재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인근인 심양(瀋陽)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도간(陶侃)은 대사마(大司馬)를 지내고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진 동진의 개국 공신이었고, 할아버지는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당시의 명사로 알려진 맹가(孟嘉)였지만 도연명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몰락했다. 어려서부터 빈한해 직접 생업에 힘써야 했지만, 독서를 좋아해 유가와 도가의 경전은 물론이고 『산해경(山海經)』 같은 이서(異書)까지 즐겨 읽었다.

태원(太元) 5년(380), 비로소 출사의 기회가 주어져 주좨주(州祭酒)로 부임하지만 며칠 만에 그만두고서 귀가해 버렸다. 이후 주(州)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근 20년에 달하도록 은거하다가, 398년 47세에 군벌인 환현(桓玄, 369∼404)의 막하에 들어갔는데, 머잖아 모친상으로 귀가했다. 404년 53세에 유유(劉裕)의 참군(參軍)이 되고, 405년에는 유경선(劉敬宣)의 참군으로 옮겼다.

그가 군벌의 막하에 들어간 것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작품에는 불편한 심사가 가득 넘쳐 나고 있어, 자신의 처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얼마 후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하지만, 군(郡)에서 파견한 관리를 깍듯이 모시라는 말에 “나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저 시골의 애송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里小兒)”라 하고,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귀거래사]를 부르면서 전원으로 영원히 돌아가 버렸다.

의희(義熙) 2년(406) 이후 도연명은 다시 농부로서의 삶을 그런대로 평온하게 영위해 나갔다. 408년 57세에 화재가 나서 전 재산을 잃고, 조각배 속에서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고 병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창작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411년 도연명이 60세가 되던 해, 예전의 상관인 유유가 태위(太尉)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도연명을 저작랑(著作郞)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또 이 무렵 안연지와 약 1년 동안 교유했다.

420년, 도연명이 69세가 되던 해 유유는 마침내 칭제해 송(宋)을 개국했다. 당시 권세가 단도제(檀道濟, ?∼436)의 회유적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시종일관 새로운 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년에는 극심한 가난과 병마에 고생하면서도 [걸식(乞食)]과 [자제문(自祭文)] 등을 쓰면서 죽음을 의연히 맞아들였다. 원가(元嘉) 4년(427), 76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도연명(陶淵明)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심약(沈約)의 『송서(宋書)』에 근거해 도연명의 향년을 63세로 보았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참고할 때 최근 위안싱페이 교수가 주장한 76세설이 가장 타당하다. 도연명은 영화(永和) 8년, 서기 352년에, 현재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인근인 심양(瀋陽)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도간(陶侃)은 대사마(大司馬)를 지내고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진 동진의 개국 공신이었고, 할아버지는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당시의 명사로 알려진 맹가(孟嘉)였지만 도연명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몰락했다. 어려서부터 빈한해 직접 생업에 힘써야 했지만, 독서를 좋아해 유가와 도가의 경전은 물론이고 『산해경(山海經)』 같은 이서(異書)까지 즐겨 읽었다.

태원(太元) 5년(380), 비로소 출사의 기회가 주어져 주좨주(州祭酒)로 부임하지만 며칠 만에 그만두고서 귀가해 버렸다. 이후 주(州)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근 20년에 달하도록 은거하다가, 398년 47세에 군벌인 환현(桓玄, 369∼404)의 막하에 들어갔는데, 머잖아 모친상으로 귀가했다. 404년 53세에 유유(劉裕)의 참군(參軍)이 되고, 405년에는 유경선(劉敬宣)의 참군으로 옮겼다.

그가 군벌의 막하에 들어간 것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작품에는 불편한 심사가 가득 넘쳐 나고 있어, 자신의 처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얼마 후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하지만, 군(郡)에서 파견한 관리를 깍듯이 모시라는 말에 “나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저 시골의 애송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里小兒)”라 하고,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귀거래사]를 부르면서 전원으로 영원히 돌아가 버렸다.

의희(義熙) 2년(406) 이후 도연명은 다시 농부로서의 삶을 그런대로 평온하게 영위해 나갔다. 408년 57세에 화재가 나서 전 재산을 잃고, 조각배 속에서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고 병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창작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411년 도연명이 60세가 되던 해, 예전의 상관인 유유가 태위(太尉)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도연명을 저작랑(著作郞)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또 이 무렵 안연지와 약 1년 동안 교유했다.

420년, 도연명이 69세가 되던 해 유유는 마침내 칭제해 송(宋)을 개국했다. 당시 권세가 단도제(檀道濟, ?∼436)의 회유적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시종일관 새로운 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년에는 극심한 가난과 병마에 고생하면서도 [걸식(乞食)]과 [자제문(自祭文)] 등을 쓰면서 죽음을 의연히 맞아들였다. 원가(元嘉) 4년(427), 76세의 나이로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