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陶淵明)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심약(沈約)의 『송서(宋書)』에 근거해 도연명의 향년을 63세로 보았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참고할 때 최근 위안싱페이 교수가 주장한 76세설이 가장 타당하다. 도연명은 영화(永和) 8년, 서기 352년에, 현재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인근인 심양(瀋陽)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도간(陶侃)은 대사마(大司馬)를 지내고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진 동진의 개국 공신이었고, 할아버지는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당시의 명사로 알려진 맹가(孟嘉)였지만 도연명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몰락했다. 어려서부터 빈한해 직접 생업에 힘써야 했지만, 독서를 좋아해 유가와 도가의 경전은 물론이고 『산해경(山海經)』 같은 이서(異書)까지 즐겨 읽었다.
태원(太元) 5년(380), 비로소 출사의 기회가 주어져 주좨주(州祭酒)로 부임하지만 며칠 만에 그만두고서 귀가해 버렸다. 이후 주(州)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근 20년에 달하도록 은거하다가, 398년 47세에 군벌인 환현(桓玄, 369∼404)의 막하에 들어갔는데, 머잖아 모친상으로 귀가했다. 404년 53세에 유유(劉裕)의 참군(參軍)이 되고, 405년에는 유경선(劉敬宣)의 참군으로 옮겼다.
그가 군벌의 막하에 들어간 것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작품에는 불편한 심사가 가득 넘쳐 나고 있어, 자신의 처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얼마 후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하지만, 군(郡)에서 파견한 관리를 깍듯이 모시라는 말에 “나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저 시골의 애송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里小兒)”라 하고,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귀거래사]를 부르면서 전원으로 영원히 돌아가 버렸다.
의희(義熙) 2년(406) 이후 도연명은 다시 농부로서의 삶을 그런대로 평온하게 영위해 나갔다. 408년 57세에 화재가 나서 전 재산을 잃고, 조각배 속에서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고 병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창작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411년 도연명이 60세가 되던 해, 예전의 상관인 유유가 태위(太尉)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도연명을 저작랑(著作郞)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또 이 무렵 안연지와 약 1년 동안 교유했다.
420년, 도연명이 69세가 되던 해 유유는 마침내 칭제해 송(宋)을 개국했다. 당시 권세가 단도제(檀道濟, ?∼436)의 회유적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시종일관 새로운 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년에는 극심한 가난과 병마에 고생하면서도 [걸식(乞食)]과 [자제문(自祭文)] 등을 쓰면서 죽음을 의연히 맞아들였다. 원가(元嘉) 4년(427), 76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도연명(陶淵明)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심약(沈約)의 『송서(宋書)』에 근거해 도연명의 향년을 63세로 보았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참고할 때 최근 위안싱페이 교수가 주장한 76세설이 가장 타당하다. 도연명은 영화(永和) 8년, 서기 352년에, 현재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인근인 심양(瀋陽)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도간(陶侃)은 대사마(大司馬)를 지내고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진 동진의 개국 공신이었고, 할아버지는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당시의 명사로 알려진 맹가(孟嘉)였지만 도연명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몰락했다. 어려서부터 빈한해 직접 생업에 힘써야 했지만, 독서를 좋아해 유가와 도가의 경전은 물론이고 『산해경(山海經)』 같은 이서(異書)까지 즐겨 읽었다.
태원(太元) 5년(380), 비로소 출사의 기회가 주어져 주좨주(州祭酒)로 부임하지만 며칠 만에 그만두고서 귀가해 버렸다. 이후 주(州)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근 20년에 달하도록 은거하다가, 398년 47세에 군벌인 환현(桓玄, 369∼404)의 막하에 들어갔는데, 머잖아 모친상으로 귀가했다. 404년 53세에 유유(劉裕)의 참군(參軍)이 되고, 405년에는 유경선(劉敬宣)의 참군으로 옮겼다.
그가 군벌의 막하에 들어간 것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작품에는 불편한 심사가 가득 넘쳐 나고 있어, 자신의 처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얼마 후 팽택(彭澤)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하지만, 군(郡)에서 파견한 관리를 깍듯이 모시라는 말에 “나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저 시골의 애송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里小兒)”라 하고,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귀거래사]를 부르면서 전원으로 영원히 돌아가 버렸다.
의희(義熙) 2년(406) 이후 도연명은 다시 농부로서의 삶을 그런대로 평온하게 영위해 나갔다. 408년 57세에 화재가 나서 전 재산을 잃고, 조각배 속에서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고 병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창작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411년 도연명이 60세가 되던 해, 예전의 상관인 유유가 태위(太尉)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도연명을 저작랑(著作郞)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또 이 무렵 안연지와 약 1년 동안 교유했다.
420년, 도연명이 69세가 되던 해 유유는 마침내 칭제해 송(宋)을 개국했다. 당시 권세가 단도제(檀道濟, ?∼436)의 회유적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시종일관 새로운 왕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년에는 극심한 가난과 병마에 고생하면서도 [걸식(乞食)]과 [자제문(自祭文)] 등을 쓰면서 죽음을 의연히 맞아들였다. 원가(元嘉) 4년(427), 76세의 나이로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