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본질에 관한 열 차례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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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5/04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91159319242
Categories 인문 > 독서/비평
Description
피히테가 1805년 독일 에를랑겐 대학에서 진행했던 대중강연을 바탕으로 한 ‘학자의 본질과 자유의 영역에서 그것이 드러난 모습에 관하여’라는 강의록을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책세상문고·고전의세계가 출범할 당시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던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의 후속편이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만큼이나 혼란스러웠던 세기 전환기의 독일에서 피히테는 당대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바른 학문과 학자의 상을 탐구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리와 자유를 학문의 본질로 보았고 이것을 인간의 본질적 가치로 규정한다. 그리고 학문 연구를 소명으로 삼은 학자는 어떤 사명과 이념을 가지고 학문에 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자세여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사업을 수주하고 연구비를 끌어와야 하는 오늘날 대학의 모습에서, 순수 학문의 중요성과 학자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피히테의 입장은 시대착오적이고 고답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사람이 사람다워야 함이 당연하듯, 학문은 학문다워야 하고 학자는 학자다워야 한다고 웅변한다.
Contents
들어가는 말 | 서정혁
서문

첫 번째 강의 : 전체의 계획
두 번째 강의 : 신적 이념이라는 개념의 상세한 규정
세 번째 강의 : 초보 학자 일반에 대하여. 특히 재능과 노력에 대하여
네 번째 강의 : 연구의 성실성에 관해
다섯 번째 강의 : 연구자의 성실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여섯 번째 강의 : 학문의 자유에 대하여
일곱 번째 강의 : 보편적으로 완성된 학자에 대하여
여덟 번째 강의 : 통치자에 대하여
아홉 번째 강의 : 구술하는 학자-교수자에 대하여
열 번째 강의 : 저술가에 대하여

해제- 학자의 사명과 본질


더 읽어야 할 자료들
옮긴이에 대하여
Author
요한 G. 피히테,서정혁
가난한 세공업자의 십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그의 재능을 발견한 한 목사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립학교와 귀족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며, 유년 시절에 이미 정통교리주의와 계몽주의 간의 갈등을 경험하고, 18세에 예나 대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졸업시험도 치지 못한 채 가정교사로 일한다. 1790년 칸트의 철학을 접하면서 정신적인 혁명을 경험하고, 자유의 철학인 칸트의 사상에 매료되어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라는 최초의 철학적인 글을 써서 칸트를 직접 만난다. 칸트는 이 글을 읽고 익명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후 이 저작의 저자임이 밝혀지면서 피히테는 무명의 가정교사에서 일약 유명한 철학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괴테에게서 칸트주의자인 라인홀트의 승계자로 지목받아 예나 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그러나 예나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귀족 출신 대학생들의 비밀조직을 해체하려 한 그의 시도가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실러와의 공동 작업 역시 어떤 성과도 없이 격렬한 논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더욱이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가 일요 예배시간에 시행되자 교회로부터 반박당하게 되고, 이 일을 빌미로 무신론자로 몰려 결국 예나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베를린으로 건너간 그는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학’인 지식학을 현실로 전환시켜보고자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후 그의 명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러다가 1805년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되살아난다. 1810~1812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활동하다 슐라이어마허와의 불화로 총장직을 그만둔다. 1814년,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숨을 거뒀다.

주요 저작으로는 『전체 학문론의 기초』, 『인간의 사명』, 『독일 국민에게 고함』, 『학문론 또는 이른바 철학의 개념에 관하여』, 『자연법의 기초』 등이 있다
가난한 세공업자의 십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그의 재능을 발견한 한 목사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립학교와 귀족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며, 유년 시절에 이미 정통교리주의와 계몽주의 간의 갈등을 경험하고, 18세에 예나 대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졸업시험도 치지 못한 채 가정교사로 일한다. 1790년 칸트의 철학을 접하면서 정신적인 혁명을 경험하고, 자유의 철학인 칸트의 사상에 매료되어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라는 최초의 철학적인 글을 써서 칸트를 직접 만난다. 칸트는 이 글을 읽고 익명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후 이 저작의 저자임이 밝혀지면서 피히테는 무명의 가정교사에서 일약 유명한 철학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괴테에게서 칸트주의자인 라인홀트의 승계자로 지목받아 예나 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그러나 예나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귀족 출신 대학생들의 비밀조직을 해체하려 한 그의 시도가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실러와의 공동 작업 역시 어떤 성과도 없이 격렬한 논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더욱이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가 일요 예배시간에 시행되자 교회로부터 반박당하게 되고, 이 일을 빌미로 무신론자로 몰려 결국 예나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베를린으로 건너간 그는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학’인 지식학을 현실로 전환시켜보고자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후 그의 명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러다가 1805년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되살아난다. 1810~1812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활동하다 슐라이어마허와의 불화로 총장직을 그만둔다. 1814년,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숨을 거뒀다.

주요 저작으로는 『전체 학문론의 기초』, 『인간의 사명』, 『독일 국민에게 고함』, 『학문론 또는 이른바 철학의 개념에 관하여』, 『자연법의 기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