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교육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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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9/11/30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91159314063
Categories 인문 > 서양철학
Description
18-19세기 유럽은 오직 이성과 과학만이 사회의 진보를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독일의 정치가이자 교육 사상가 훔볼트는 단일한 목적만을 강조하는 교육은 인간의 다양성을 해치고 틀에 박힌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또한 진정한 교육은 개인의 감성과 다양성을 자유롭게 보장하고 개인의 특성을 균형감 있게 계발하는 전인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교육관은 마르크스, 비스마크르, 아인슈타인, 하이네 등을 배출한 훔볼트 대학의 창립으로 이어졌으며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은 실용성만을 강조하고 수단화, 획일화되고 있는 현재의 교육에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Contents
들어가는 말 | 양대종

인간 교육론

인류의 정신에 대하여

국가 활동의 한계 규정 시도를 위한 생각들
Ⅰ 들어가는 말
Ⅱ 인간의 최종 목적
Ⅲ 국가 그리고 시민의 안녕
Ⅳ 국가의 최종 목적
Ⅴ 외부의 적에 대한 안전
Ⅵ 국가의 공교육에 대하여
Ⅶ 국가와 종교

베를린 고등 학술 기관의 내외 조직에 대하여

해제 -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건강한 조화 | 양대종
1. 훔볼트와 인본주의 교육 사상
2. 훔볼트의 생애와 사상
3. 번역한 텍스트들에 대하여
4. 훔볼트 교육 이론의 현대적 의미
Author
빌헬름 폰 훔볼트,양대종
1767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인 베를린 근교에 위치한 포츠담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로이센 개혁 시대이자 이른바 '괴테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평생에 걸쳐 인간의 본성을 중심에 둔 교육, 언어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탐구한 인본주의 사상가이자 교육가, 언어학자, 외교관, 정치가였다. 유년 시절부터 당대의 유명한 지성인들을 가정교사로 두고 고전어와 현대어, 수학, 경제학, 통계학, 법학 등 학문 전 분야에 걸쳐 세심하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교육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독일 최초의 근대식 대학으로서 계몽주의 이념이 지배적이던 괴팅겐 대학에서는 철학과 역사, 고전어를 전공했다. 실러, 괴테 등 바이마르 고전주의자들과 긴밀히 교제했으며, 특히 실러를 자신의 학문적 이상으로 삼았다. 1801년부터 프로이센의 교황청 주재 외교 사절로 로마에서 6년을 보냈으며, 귀국 후에는 문화교육국장으로 임명되어 당대 프로이센의 교육 제도를 개혁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교육의 목표를 설정함에 있어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두었으며, 개개인의 능력을 균형 잡힌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과정에서 모든 국가적 통제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의 사상은 그가 주도한 교육 개혁 정책에 반영되었으며, 훗날 훔볼트 대학으로 개칭된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가로서 현역에서 물러난 후에는 베를린 근교의 테겔 성에서 15년간 지내면서 20세기 언어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는 비교 언어 연구에 몰두했고, 1835년에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 『국가 활동의 한계 규정 시도를 위한 생각들』, 『역사 저술가의 과제에 대하여』, 『자바섬의 카위어에 대하여』가 있다.
1767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인 베를린 근교에 위치한 포츠담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로이센 개혁 시대이자 이른바 '괴테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평생에 걸쳐 인간의 본성을 중심에 둔 교육, 언어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탐구한 인본주의 사상가이자 교육가, 언어학자, 외교관, 정치가였다. 유년 시절부터 당대의 유명한 지성인들을 가정교사로 두고 고전어와 현대어, 수학, 경제학, 통계학, 법학 등 학문 전 분야에 걸쳐 세심하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교육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독일 최초의 근대식 대학으로서 계몽주의 이념이 지배적이던 괴팅겐 대학에서는 철학과 역사, 고전어를 전공했다. 실러, 괴테 등 바이마르 고전주의자들과 긴밀히 교제했으며, 특히 실러를 자신의 학문적 이상으로 삼았다. 1801년부터 프로이센의 교황청 주재 외교 사절로 로마에서 6년을 보냈으며, 귀국 후에는 문화교육국장으로 임명되어 당대 프로이센의 교육 제도를 개혁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교육의 목표를 설정함에 있어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두었으며, 개개인의 능력을 균형 잡힌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과정에서 모든 국가적 통제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의 사상은 그가 주도한 교육 개혁 정책에 반영되었으며, 훗날 훔볼트 대학으로 개칭된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가로서 현역에서 물러난 후에는 베를린 근교의 테겔 성에서 15년간 지내면서 20세기 언어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는 비교 언어 연구에 몰두했고, 1835년에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 『국가 활동의 한계 규정 시도를 위한 생각들』, 『역사 저술가의 과제에 대하여』, 『자바섬의 카위어에 대하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