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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예술과 자연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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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7/10/30
Pages/Weight/Size 129*190*20mm
ISBN 9791159311390
Description
헤겔, 횔덜린, 슐레겔 등과 같은 시대를 산 셸링F. W. J. Schelling(1775~1854)은,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관념론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의 교량적 단계로, 때로는 비합리적이거나 신비적인 사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특히 지금까지는 그의 사상을 칸트, 피히테를 계승하여 헤겔로 이어주는 철학사적 교량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셸링의 『조형예술과 자연의 관계』(책세상문고?고전의세계 012)를 살펴보면, 그가 독일 관념론의 형성 과정에서 기존의 사상가들(칸트, 피히테 등)에게 끊임없이 비판적인 문제를 제기했고, 형식에 얽매여 있던 고전주의에 경도된 당대 예술가들을 질책함으로써 예술 본연의 모습을 구현하려 했으며 이와 함께 철학의 하위 범주에 속해 있던 예술을 철학 최고의 위치로까지 끌어올린 당대 최고의 지식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명쾌하고도 적절한 논변을 통해 셸링의 예술철학이 겨냥하고 있는 학문적 노선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고 평가받는 『조형예술과 자연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깊이 고민해야 할 예술의 근본 가치들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살아 있는 고전’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Contents

들어가는 말|심철민 6

조형예술과 자연의 관계 11

해제-조형예술의 빛, 자연에서 영혼으로|심철민 67
1. 셸링의 생애와 저작 67
2. 셸링 철학의 시기 구분 70
3. 『조형예술과 자연의 관계』의 사상적 배경 74
4. 『조형예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하여 85
5. 셸링 철학의 지성사적 영향과 텍스트의 현재적 의미 93

주 98
더 읽어야 할 자료들 132
옮긴이에 대하여 140
Author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심철민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레온베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튀빙겐대학교에 입학해 헤겔과 횔덜린을 사귀었다. 17세 때 원죄에 관한 내용으로 학위논문을 썼으며, 1793년부터 지속적으로 철학 논문들을 발표해 독일 철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 글에서는 피히테의 영향이 많이 보이지만, 1797년에 발표한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부터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세계를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 1798년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된다. 셸링은 그곳에서 괴테, 실러, 슐레겔 등 독일 낭만파 작가들과 사귀었으며, A. W. 슐레겔의 아내인 카롤리네 슐레겔을 만났다. 그녀는 1803년에 이혼하고 셸링과 결혼했다.

1802년과 1803년에 셸링은 헤겔과 함께 ≪철학 비판지(Kritisches Journal der Philosophie)≫를 제작했다. 헤겔은 그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그를 친구이자 스승처럼 생각했고, 헤겔의 첫 번째 저술도 ≪피히테의 철학 체계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1801)다. 그러나 튀빙겐대학교에서부터 맺어 온 셸링과 헤겔의 우정은 헤겔이 ≪정신현상학≫(1807)을 발표한 뒤 깨진다. 셸링은 1803년 뷔르츠부르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1806년에는 뮌헨으로 가서 바이에른 학술원 회원과 미술대학 사무총장을 지내게 된다. 에를랑겐대학교에서도 강의했으며, 1827년에는 뮌헨대학교 교수직을 맡고 미술대학 학장도 지내게 된다. 184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베를린대학교로 셸링을 초빙했으며, 그는 그곳에서 1846년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는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키르케고르, 엥겔스, 부르크하르트, 바쿠닌도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1797), ≪자연철학의 체계에 대한 첫 번째 기획≫(1799),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1800), ≪대학 수업 방법에 관한 강의≫(1803),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1809), 사후 출간된 ≪예술철학≫(1859), ≪신화 철학≫(1856), ≪계시 철학≫(1861) 등이 있다.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레온베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튀빙겐대학교에 입학해 헤겔과 횔덜린을 사귀었다. 17세 때 원죄에 관한 내용으로 학위논문을 썼으며, 1793년부터 지속적으로 철학 논문들을 발표해 독일 철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 글에서는 피히테의 영향이 많이 보이지만, 1797년에 발표한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부터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세계를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 1798년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된다. 셸링은 그곳에서 괴테, 실러, 슐레겔 등 독일 낭만파 작가들과 사귀었으며, A. W. 슐레겔의 아내인 카롤리네 슐레겔을 만났다. 그녀는 1803년에 이혼하고 셸링과 결혼했다.

1802년과 1803년에 셸링은 헤겔과 함께 ≪철학 비판지(Kritisches Journal der Philosophie)≫를 제작했다. 헤겔은 그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그를 친구이자 스승처럼 생각했고, 헤겔의 첫 번째 저술도 ≪피히테의 철학 체계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1801)다. 그러나 튀빙겐대학교에서부터 맺어 온 셸링과 헤겔의 우정은 헤겔이 ≪정신현상학≫(1807)을 발표한 뒤 깨진다. 셸링은 1803년 뷔르츠부르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1806년에는 뮌헨으로 가서 바이에른 학술원 회원과 미술대학 사무총장을 지내게 된다. 에를랑겐대학교에서도 강의했으며, 1827년에는 뮌헨대학교 교수직을 맡고 미술대학 학장도 지내게 된다. 184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베를린대학교로 셸링을 초빙했으며, 그는 그곳에서 1846년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는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키르케고르, 엥겔스, 부르크하르트, 바쿠닌도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1797), ≪자연철학의 체계에 대한 첫 번째 기획≫(1799),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1800), ≪대학 수업 방법에 관한 강의≫(1803),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1809), 사후 출간된 ≪예술철학≫(1859), ≪신화 철학≫(1856), ≪계시 철학≫(186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