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뮌헨, 런던, 에든버러, 빠리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러시아어와 음악의 역사에 관심을 두었다가 1915년 런던에서 중국학에 입문, 프랑스로 건너와 동양어학교(Ecole des langues orientales)에서 공부했다. 1918년 디플롬을 취득한 직후, 25세 나이로 프랑스 극동연구소(Ecole francaise d'extreme-orient)에 들어갔다. 에두아르 샤반의 문하에서 중국어와 중국학을 배웠고, 실벵 레비의 지도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고전문헌학을 사사받았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극동연구소 연구원 자격으로 베트남 하노이에, 아모이 대학 교수로 중국에, 메종 프랑코-자포네즈(Maison franco-japonaise) 연구생으로, 나중에는 임시 책임자로 일본에 체류했다. 이때부터 벌써 ?중국 고고학 노트?나 ?『밀린다팡하』의 한역본들? 같은, 문헌학적 방법의 모델이자 해박함과 비판적 분석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논고들을 집필해, 중국학 및 불교학 분야에서 일약 두각을 나타냈다. 불교 백과사전 『법보의림法?義林』 편찬 작업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 중 하나다. 실벵 레비와 타카쿠스 준지로가 편찬에 착수한 1926년부터 폴 드미에빌은 이 작업에 관여했고, 이내 주필이 되어선 그 항목 대부분을 집필했으며, 작고하기 몇 달 전까지도 개정판 작업을 진두지휘했으니, 가히 일생에 걸친 작업이라 할 만하다. 1930년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1931년부터 1945년까지 국립동양어학교와 중국학 고등연구원(Institut des hautes etudes chinoises), 고등연구학교 제4섹션(Ecole pratique des hautes etudes, IV section)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다. 1945년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작고하자 그를 대신해 중국학 저널 『통보通報』의 편집을 맡았고, 1976년까지 무려 30여 년간 뒤벤닥(Duyvendak), 훌스웨(Hulsewe) 등과 함께 저널을 이끌었다. 1946년부터는 강제수용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앙리 마스페로(Henri Maspero)를 이어 꼴레쥬 드 프랑스의 중국어문학 강좌를 책임졌다. 1951년 프랑스 금석학 문학 아카데미(Acade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회원으로 위촉됐다. 그의 학문적 관심사와 업적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분야에 두루 걸쳐 있었지만, 둔황 필사본을 비롯해 당唐과 오대五代의 통속문학, 한역 위경僞經과 선禪의 반反교학주의도 그가 몰두했던 주제들이다. 한시漢詩 애호가이기도 했으니, 실은 중국문학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거장이었다.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뮌헨, 런던, 에든버러, 빠리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러시아어와 음악의 역사에 관심을 두었다가 1915년 런던에서 중국학에 입문, 프랑스로 건너와 동양어학교(Ecole des langues orientales)에서 공부했다. 1918년 디플롬을 취득한 직후, 25세 나이로 프랑스 극동연구소(Ecole francaise d'extreme-orient)에 들어갔다. 에두아르 샤반의 문하에서 중국어와 중국학을 배웠고, 실벵 레비의 지도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고전문헌학을 사사받았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극동연구소 연구원 자격으로 베트남 하노이에, 아모이 대학 교수로 중국에, 메종 프랑코-자포네즈(Maison franco-japonaise) 연구생으로, 나중에는 임시 책임자로 일본에 체류했다. 이때부터 벌써 ?중국 고고학 노트?나 ?『밀린다팡하』의 한역본들? 같은, 문헌학적 방법의 모델이자 해박함과 비판적 분석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논고들을 집필해, 중국학 및 불교학 분야에서 일약 두각을 나타냈다. 불교 백과사전 『법보의림法?義林』 편찬 작업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 중 하나다. 실벵 레비와 타카쿠스 준지로가 편찬에 착수한 1926년부터 폴 드미에빌은 이 작업에 관여했고, 이내 주필이 되어선 그 항목 대부분을 집필했으며, 작고하기 몇 달 전까지도 개정판 작업을 진두지휘했으니, 가히 일생에 걸친 작업이라 할 만하다. 1930년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1931년부터 1945년까지 국립동양어학교와 중국학 고등연구원(Institut des hautes etudes chinoises), 고등연구학교 제4섹션(Ecole pratique des hautes etudes, IV section)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다. 1945년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작고하자 그를 대신해 중국학 저널 『통보通報』의 편집을 맡았고, 1976년까지 무려 30여 년간 뒤벤닥(Duyvendak), 훌스웨(Hulsewe) 등과 함께 저널을 이끌었다. 1946년부터는 강제수용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앙리 마스페로(Henri Maspero)를 이어 꼴레쥬 드 프랑스의 중국어문학 강좌를 책임졌다. 1951년 프랑스 금석학 문학 아카데미(Acade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회원으로 위촉됐다. 그의 학문적 관심사와 업적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분야에 두루 걸쳐 있었지만, 둔황 필사본을 비롯해 당唐과 오대五代의 통속문학, 한역 위경僞經과 선禪의 반反교학주의도 그가 몰두했던 주제들이다. 한시漢詩 애호가이기도 했으니, 실은 중국문학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