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또 한 권의 「논어」 완역본이 나왔습니다. 공자는 춘추시대를 살아갔습니다. 문왕, 무왕, 주공이 살던 서주 시대에 비해 훨씬 어지러운 시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오종주’,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간 시대를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보십시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여 남을 파괴하고 심지어 자신까지 파멸로 이끄는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논어」는 우리를 비추어 주는 양심의 거울입니다.
사람은 분명한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울 눈금을 속이면 물건 값이 제멋대로일 것이고, 시장 질서를 교란시킬 것입니다. 거짓이 진리가 되고 진리가 거짓으로 둔갑하는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많으면 세상은 참으로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외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기준을 갖지 않으면 사람은 넘어지고 깨지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성찰하면서 마음을 붙들어 매어 두어야 합니다. 「논어」는 성찰하기 딱! 좋은 텍스트입니다.
「논어」에 담긴 공자님의 가르침은 대강 이렇습니다. 배움, 효도, 우애, 정치, 인덕, 의, 예, 용기, 지혜, 신의, 공경, 공손 등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천, 천명, 인간, 초목금수에 이르기까지 언급하고 있으니 「논어」에 대한 해설은 다양합니다.
단순히 도덕 윤리만을 강조한 텍스트가 아닌 것입니다. 「논어」 텍스트는 다양한 학문적 입장에서 다양한 해설을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철학, 정치학, 경제학, 윤리학, 미학, 심리학, 인간 관계학, 자기 계발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춰볼 수 있는, 팔색조를 띠고 있는 게 그 특징이라 봅니다. 작가는 이미 「논어」에 관해 2권을 펴낸 바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논어」를 읽고 싶어 하지만 한문에 막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들을 위해 기존 많은 자료들을 근거로 매끄러운 문장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논어」를 쉽게 읽고 싶은 독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Contents
옮긴이의 말
「논어」에 대해
공자는 누구인가?
1. 학이 편
공자 3호, 증자 3호, 사람됨의 기본
2. 위정 편
덕 있는 자를 북극성에 비유
3. 팔일 편
팔일 무는 천자가 지내는 예
4. 이인 편
인덕으로 사는 공동체
5. 공야장 편
공야장은 사위로, 남용은 조카 사위로
6. 옹야 편
중궁은 왕이 될 만함
7. 술이 편
술이부작
8. 태백 편
태백은 천하를 세 번 양도
9. 자한 편
이익, 명, 인덕을 드물게 말함
10. 향당 편
마을, 종묘, 조정에서
11. 선진 편
선진을 등용
12. 안연 편
극기복례
13. 자로 편
지도자는 솔선해야
14. 헌문 편
도가 있을 때 녹봉을 받아야
15. 위령공 편
진법은 모름
16. 계씨 편
계씨의 걱정거리는 담장 안에
17. 양화 편
양화와의 만남
18. 미자 편
은나라 세 인자
19. 자장 편
견득사의
20. 요왈 편
요, 순, 우, 탕, 무왕
Author
공자,이준자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아버지 숙양홀(叔梁紇)과 어머니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둘레가 언덕처럼 솟아 있어 이름을 구(丘: 언 덕 구)라고 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씨(季氏) 가문의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48살 때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497년 이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479년 73살 때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언덕)에 묻혔다.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아버지 숙양홀(叔梁紇)과 어머니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둘레가 언덕처럼 솟아 있어 이름을 구(丘: 언 덕 구)라고 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씨(季氏) 가문의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48살 때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497년 이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479년 73살 때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언덕)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