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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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4/06/15
Pages/Weight/Size 210*297*8mm
ISBN 9791130417486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위고 시선』은 빅토르 위고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간행된 시집인 <정신의 네 바람>에 이르기까지 열권의 시집과 사후 유고집으로 나온 <모든 리라>와 <마지막 꽃다발>의 두 권을 택해 총 50편의 작품을 선별, 수록했다.

<저자 소개>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 코르디에 기숙학교에 입학한 이래,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었던 위고는 이듬해 그의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기록해 두면서, 불과 열한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이다. 이런 그에게 운명의 분수령이 된 것은 스무 살이 되던 1822년, 그의 첫 시집인 ≪송가≫를 발간했을 때다. 스물세 살의 위고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이 무렵부터 위고는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2년 뒤 위고는 마침내 희곡 <크롬웰>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843년은 <성주들>의 뜻밖의 실패로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위고의 연극이 쓰라린 패배를 당한 해이며, 그가 애지중지하던 열아홉 살의 맏딸 레오폴딘이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센 강 하류 빌키에에서 사위와 함께 보트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해이기도 하다. 이 불행한 사고로 인해 위고는 6개월이나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좌절과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1876년 상원의원에 선출되어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는 한편, ≪할아버지 되는 법≫, ≪교황≫, ≪정신의 네 바람≫ 등 새로운 시집들을 간행하면서 건재를 과시했다. 1881년 2월 27일, 성급한 제3공화국은 그의 80세 생일 기념행사를 한 해 앞당겨 거행했다. 에투알 광장에 운집한 60만 군중이 5만 명의 어린이를 앞세워 그의 집으로 행진해 왔을 때, 백발의 빅토르 위고는 자기 집 2층 창가로 나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감사를 표했다. 프랑스 상원도 빅토르 위고에게 예를 갖추어 축하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파리의 엘로로의 이름을 ‘빅토르 위고 대로’라 개명했다. 1885년 5월 22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빅토르 위고는 총 스무 권의 시집, 열 편의 희곡, 열 편의 장편소설, 다섯 권의 논집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이 위대한 문학 업적과 독재에 맞서 민중을 이끈 사상가로서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6월 1일 월요일 11시로 국장을 결정한 프랑스 의회는, 고인의 뜻에 따라 초라한 수레에 실어 운구하도록 하는 한편, 조문객을 위해 5월 31일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시인의 영구를 개선문 아래에 안치하도록 했다. 샹젤리제를 포함하여 열두 갈래의 대로를 가득 메운 채 조문의 순서를 기다리는 남녀노소 시민들의 수는 무려 200만 명에 달했으며, 열두 명의 시인이 밤을 새워 그를 지켰다. 장례가 끝나자 가난한 파리 시민들이 시신을 개선문에서 팡테옹으로 운구했는데, 수많은 인파가 장례 행렬을 따르며 애도했다.

1958년 서울의 한 근면한 가정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학교 밖에서 놀기 좋아하는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 이곳저곳으로 몇 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많은 문학 서적만큼은 그때마다 잃어버리는 법이 없었던 형님들 덕에 청소년기에 들어서서는 자연스레 독서를 즐기며 공상에 잠기곤 했던 행운을 누렸다. 고등학생 시절 가끔씩 선 멋을 부리며 습작하는 데에서 미묘한 희열을 느꼈던 문학적 취향과 서점 안을 기웃거리던 호기심은, 서강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 그렇게 지워진 듯했다. 그러던 중 교양과목 삼아 접한 불문학 강의는 일생일대의 신비한 동요를 불러일으켰고, 이미 고인이 되신 불문학자 강거배 교수님의 참스승다운 가르침이 가슴 설레는 미지의 인생 항로로 이끌었다. 졸업 후 1년쯤 지나서야 부모님 승낙을 얻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 7대학에서 불어학 학사, 석사학위를 받은 다음, 파리 4대학으로 옮겨 불문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부족한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신 부모님과 이해심 깊은 아내의 격려 덕분에 10년 유학 생활의 결실로 1994년 <빅토르 위고의 작시법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이후 창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프랑스 시 강의를 맡고 있고, 빅토르 위고와 베를렌 시의 예술성에 관한 연구 논문 발표를 이어나가고 있다.
Contents
해설
지은이에 대해

기다림
달빛
몽상
석양의 햇살 I
황홀
어느 여인에게
아틀라스 산에서의 어느 날
어린아이
꽃이 만발한 5월의 초원
밤의 대양
올랭피오에게
6월의 밤
시인의 본분
어느 시인에게
바닷가에 잠든 한 아이에게 바치는 묘비명
제비가 봄에 찾는 것은
저물어가는 밤
젊은이들이여, 남의 말을 삼가라
전원을 찾아 나선 시인
푀이앙틴에서
오라! 보이지 않는 플루트가
행복한 사람
샘터
내일, 새벽 일찍
왔노라, 보았노라, 살았노라
들판의 안개 속으로 달이 보일 때

벼락
황혼
죽음
아침 산책
설명
봄이 오면
걸인
저녁의 기쁨
목동과 양 떼
어린 시절
하늘엔 광대한 빛이 넘치네
5월 1일
현관 처마 밑의 새끼 새
모래사장에 무리 지어 있던 사람들
소 울음소리
이제 계절이 저물어
잠든 보아스
여자의 손가락
파종의 계절, 저녁
가엾은 아이들
깨진 단지

숲 속에 도사린 위험

옮긴이에 대해
Author
빅토르 위고,윤세홍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가. 1802년 프랑스의 브장송에 태어났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일찍이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위고는 첫 시집 『오데와 잡영집』(1822)으로 주목을 받은 이래, 희곡 [크롬웰](1827), 시집 『동방시집』(1829), 소설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1829)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특히 [크롬웰]에 부친 서문은 고전주의 극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극 이론의 선언서로서, 위고가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희극 [에르나니](1830)의 초연이 낭만파와 고전파 사이의 ‘에르나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로부터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가 되었다. 그 후에도 위고는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며, 시집 『가을 낙엽』(1831), 『내면의 음성』(1837), 『햇살과 그늘(1840)』, 희곡 [마리용 드 로름](1831), [힐 블라스](1838) 등을 발표했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1831)는 위고에게 민중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주었으며, 1841년에는 프랑스 학술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 뒤 위고는 10여 년간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고, 1848년 2월 혁명 등을 계기로 인도주의적 정치 성향을 굳혔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국외로 추방을 당하여,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 등에서 거의 19년에 걸쳐 망명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시집 『징벌』(1852), 『정관』(1856), 『여러 세기의 전설』(1부, 1859), 소설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들』(1867) 등 대표작의 대부분이 출간되었다. 특히,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대하 역사소설로서, ‘인간의 양심을 노래한 거대한 시편’이자 ‘역사적, 사회적, 인간적 벽화’로 평가받는 위고 필생의 걸작이다.

1870년 보불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위고는 공화주의의 옹호자로서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874년에는 『93년Quatrevingt-treize』을 출간했다.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에 여담 형태로 삽입된 ‘워털루 전투’ 이야기는 위고가 벨기에 전적지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곳곳을 답사하는 노력 끝에 집필한 것이다. 위고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문체가 돋보이는 이 글은 일세를 풍미한 영웅 나폴레옹의 패배 과정을 극적이고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며 여운을 남긴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됐으나,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켜 정계에서 은퇴했다. 국민 시인으로서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고,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내며, 『웃는 남자』(1869), 『끔찍한 해』(1872), 『93년』(1874), 『여러 세기의 전설』(2부, 1877; 3부, 1883) 등을 발표했다. 1885년 5월 폐렴으로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애도하는 가운데 그의 유해가 판테온에 안장되었다.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가. 1802년 프랑스의 브장송에 태어났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일찍이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위고는 첫 시집 『오데와 잡영집』(1822)으로 주목을 받은 이래, 희곡 [크롬웰](1827), 시집 『동방시집』(1829), 소설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1829)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특히 [크롬웰]에 부친 서문은 고전주의 극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극 이론의 선언서로서, 위고가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희극 [에르나니](1830)의 초연이 낭만파와 고전파 사이의 ‘에르나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로부터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가 되었다. 그 후에도 위고는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며, 시집 『가을 낙엽』(1831), 『내면의 음성』(1837), 『햇살과 그늘(1840)』, 희곡 [마리용 드 로름](1831), [힐 블라스](1838) 등을 발표했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1831)는 위고에게 민중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주었으며, 1841년에는 프랑스 학술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 뒤 위고는 10여 년간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고, 1848년 2월 혁명 등을 계기로 인도주의적 정치 성향을 굳혔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국외로 추방을 당하여,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 등에서 거의 19년에 걸쳐 망명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시집 『징벌』(1852), 『정관』(1856), 『여러 세기의 전설』(1부, 1859), 소설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들』(1867) 등 대표작의 대부분이 출간되었다. 특히,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대하 역사소설로서, ‘인간의 양심을 노래한 거대한 시편’이자 ‘역사적, 사회적, 인간적 벽화’로 평가받는 위고 필생의 걸작이다.

1870년 보불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위고는 공화주의의 옹호자로서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874년에는 『93년Quatrevingt-treize』을 출간했다.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에 여담 형태로 삽입된 ‘워털루 전투’ 이야기는 위고가 벨기에 전적지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곳곳을 답사하는 노력 끝에 집필한 것이다. 위고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문체가 돋보이는 이 글은 일세를 풍미한 영웅 나폴레옹의 패배 과정을 극적이고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며 여운을 남긴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됐으나,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켜 정계에서 은퇴했다. 국민 시인으로서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고,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내며, 『웃는 남자』(1869), 『끔찍한 해』(1872), 『93년』(1874), 『여러 세기의 전설』(2부, 1877; 3부, 1883) 등을 발표했다. 1885년 5월 폐렴으로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애도하는 가운데 그의 유해가 판테온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