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노랫말이 우리의 귓전을 때리던 1960년대 초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과외공부를 하지 않아도 대학입시에 합격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고3 학생들은 과외 대신 자신의 미래에 관한 고민과 독서, 그리고 토론을 많이 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쳐 직업은 교수, 전공은 경제학을 선택했다. 당시 대학 교수가 되려면 해외 특히 미국 유학이 필수로 여겨졌다. 1960년에 가톨릭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가 설립한 서강대학교는 미국 유학에 유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 나아가 경제학과는 당시 국내 최고 수준의 교수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서강의 노고산 언덕을 오르내리며 좋은 교수님들로부터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큰 은혜를 입었다. 미국 정부가 설립한 EWC Grantee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교수님들의 가르치심 덕분이었다. 나는 비교적 넉넉한 장학금의 지원을 받아 미국 대학원 생활 4년간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하여 국제경제연구원(현 산업연구원 전신)에 자리를 얻었고, 4년 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직을 얻어 마침내 고3 시절의 소망을 이루었다.
경제학은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그 이론은 과거에 일어난 경제 현상의 역사적 전개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고, 새로운 흐름이 발생하면 기존 이론이 보완 · 수정되면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한다. 경제학 교수는 학생들에게 기존 이론 중심으로 가르치지만 경제의 새로운 흐름을 파악하여 경제를 보는 시야(視野)와 시각(視角)을 더 멀고 넓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때문에 경제현상의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 · 연구와 현실 참여가 요구되기도 한다.
나는 꾸준히 기술변화가 경제 현상과 질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서강대 경제학과에 “기술경제학” 과목을 개설한 것도 학생들과 함께 기술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이 과목의 키워드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였다. 전통적 비교우위론, 독과점이론을 기술 혁신의 관점에서 보면 기존 분석과는 차별화된 논리와 결론이 나온다. 나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현실 참여를 했다. 서강대는 교수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학풍을 가지고 있다. 강의, 상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나의 자유 의지에 따라 활용할 수 있었다. 특히 방학은 교수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자유로운 경제학 교수 생활을 하던 중 직접적인 현실 참여를 하게된 것은 1990년대 중반경이었다. 그 이후 정치인들과의 의견교환 기회가 늘었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선거라는 정치행사가 구조조정 완성이라는 경제 논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현실도 겪어보았다.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들과의 인연도 이런 현실 참여 과정의 산물이었다. 두 분을 도와 내가 생각하는 경제 질서를 구현하고 싶었지만 나의 능력 부족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주창(主唱)했던 “국민행복론”과 “사람 중심 성장경제론”이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국민 후생 증진에 적합한 논리와 정책체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또 세상에 유익하게 살고 싶다”라는 삶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경제학 교수를 천직으로 택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학위를 마치고 모교의 교수가 됐고 활발한 현실 참여도 하면서 경제학자로서의 독립적 자유 의지를 유지해왔다. 이런 나의 삶은 아내와 두 딸들의 “Minimal Life”를 즐기는 마음가짐으로 가능했다. 나의 가족이 보다 많은 것을 원했다면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세속적 편의성에 뒷덜미를 잡혔을 것이다. 나는 나의 영혼을 지켜준 가족에게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현재 나의 소망은 우리 사회의 원활한 소통 구조 구축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매우 안타깝고 답답하다. 얼마 남아있지 않은 여생을 이런 일을 하면서 보내고 싶다. - 저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