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대 이후 망실되어 유문(遺文)으로 전하던 『속설(俗說)』을 다시 하나의 책으로 묶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한다. 고개지가 부채에 인물화를 그려주며 말하길, “點睛便語”(『속설』 44p 중). 전하는 이야기는 ‘눈동자를 찍으면 말을 하려 할 것’이란 한마디지만, 그 안에는 그의 회화론이 압축되어 있다. 심약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가히 동진(東晉)과 유송(劉宋) 시대 명사들의 점정(點睛)이 되는 언행이라 할 만하다.
Contents
어떤 사람이 주백인의 배를 가리키며 말하다
완광록의 큰아들이 죽다
사안이 어렸을 때 명성을 얻다
사만이 잠자리에서 늘 늦게 일어나다
사만이 사태부와 함께 간문제를 찾아뵙다
유진장이 짚신을 짜서 모친을 봉양하다
진나라 애제의 왕황후가 자마금 가락지를 끼다
진나라 간문제가 여러 담객들을 모으다
석도안의 왼팔 위로 살점 하나가 돋아나다
사인조가 스스로 잘못을 고쳐서 명사가 되다
사인조의 첩 아비
왕자경이 왕이보를 흉내 내다
은중감이 원강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
고호두가 남을 위해 부채에 그림을 그리다
환대사마가 환함에게 성을 내다
환온의 처 남군공주가 투기가 심하다
환령보가 《장자》를 직접 강론하다
환현이 시를 지으면서 피리를 불다
환현의 첩이 해산할 때 바람을 두려워하다
환선성이 동생 환매득을 볼모로 잡히고 양을 얻으려 하다
환석호가 호랑이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다
환표노가 제갈랑과 경주하다
환표노가 피로하여 병들다
왕승경이 한 시대의 표상이 되다
왕승경 형제가 신상과 같다
환현이 서예를 좋아하다
사인조가 쟁을 타며 〈추풍사〉를 부르다
환현이 정기를 총애하다
진나라 명제가 송위를 완요집에게 내려주다
원산송이 송위의 무덤에 올라 〈행로난〉 노래를 짓다
왕동정이 태공을 찾아가 하룻밤 묵으면서 작별하다
왕효백이 거사하자 왕동정이 근심 걱정하다
도기가 왕효백의 참군으로 있을 때 시를 짓다
왕경손이 만족의 시종이 되다
사첨의 털이 남다르다
치승이 청계를 유람하면서 시를 짓다
사혼이 왕고려의 손을 잡고 말하다
은백이 하무기와 함께 저포 노름을 하다
양원보가 황제의 부름을 받다
사마낭군이 기녀 놀이를 좋아하다
서간목이 젊었을 때 까마귀 꿈을 꾸다
모태가 옥와 하나를 사다
순개자의 부인이 투기가 대단하다
차무자의 부인이 투기가 대단하다
부량이 장부와 작별하다
부량이 북정에 나섰을 때 멀리 숭고산을 바라보다
하승천이 안연년에게 콩꼬투리를 묻다
주상이 강이를 기용하여 첨사를 겸임시키려 하다
사복야와 도태상이 오령군을 찾아가다
유류와 부적의 독서
유광록이 멋진 거위를 기르다
심승조가 사람의 길흉을 예측하다
속설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Author
심약,김장환
441∼513. 남조 양(梁)나라의 문학가이자 사학가로, 자(字)는 휴문(休文)이며 오흥(吳興) 무강(武康, 지금의 절강성 덕청현 무강진) 사람이다. 심약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했지만 학문에 뜻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군서(群書)를 널리 섭렵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송(宋)·제(齊)·양 3조에 걸쳐서 대대로 벼슬했는데, 송나라 때는 상서탁지랑(尙書度支郞)을 지냈고, 제나라 때는 어사중승(御使中丞)·동양 태수(東陽太守)·보국장군(輔國將軍)·오병상서(五兵尙書) 등을 역임했다. 양나라 때는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창업을 도와 그 공로로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고 건창 현후(建昌縣侯)에 봉해졌다가 다시 상서령(尙書令) 겸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전임되었다. 시호는 은(隱)이다. 그는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나서 제나라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의 문하에 들어가 사조(謝眺)·왕융(王融) 등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하나가 되었으며, 시가 창작에 있어서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을 제창하고 ‘영명체(永明體)’를 창시했다. 그의 저작으로는 《속설》 외에 《진서(晉書)》·《송서(宋書)》·《제기(齊記)》·《양무제기(梁武帝記)》·《이언(邇言)》·《송문장지(宋文章志)》·《사성보(四聲譜)》 등이 있으나, 《송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망실되었다. 그리고 후대에 명(明)나라 사람이 모아 엮은 《심은후집(沈隱侯集)》이 있다.
441∼513. 남조 양(梁)나라의 문학가이자 사학가로, 자(字)는 휴문(休文)이며 오흥(吳興) 무강(武康, 지금의 절강성 덕청현 무강진) 사람이다. 심약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했지만 학문에 뜻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군서(群書)를 널리 섭렵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송(宋)·제(齊)·양 3조에 걸쳐서 대대로 벼슬했는데, 송나라 때는 상서탁지랑(尙書度支郞)을 지냈고, 제나라 때는 어사중승(御使中丞)·동양 태수(東陽太守)·보국장군(輔國將軍)·오병상서(五兵尙書) 등을 역임했다. 양나라 때는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창업을 도와 그 공로로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고 건창 현후(建昌縣侯)에 봉해졌다가 다시 상서령(尙書令) 겸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전임되었다. 시호는 은(隱)이다. 그는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나서 제나라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의 문하에 들어가 사조(謝眺)·왕융(王融) 등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하나가 되었으며, 시가 창작에 있어서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을 제창하고 ‘영명체(永明體)’를 창시했다. 그의 저작으로는 《속설》 외에 《진서(晉書)》·《송서(宋書)》·《제기(齊記)》·《양무제기(梁武帝記)》·《이언(邇言)》·《송문장지(宋文章志)》·《사성보(四聲譜)》 등이 있으나, 《송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망실되었다. 그리고 후대에 명(明)나라 사람이 모아 엮은 《심은후집(沈隱侯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