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발라는 1834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에브뢰에서 교육행정관이며 경제학자인 오귀스트 발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학과 미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경제학자인 아버지의 충고로 경제학도의 길을 가게 되었다. 레옹 발라는 일반균형이론의 창시자로서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한 효시로 알려졌고, 그 자신이 이를 중요한 방법론으로 생각했지만 수학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이공계 대입 자격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두 번이나 낙방을 하고, 에콜 데 민에도 청강생 자격으로 들어갔으나 정식 학생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성적에 미달했다. 발라의 강점은 철학적인 전제에서 출발해 연역적인 방법으로 엄밀한 과학적인 절차에 따라 이론을 수립하려는 정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60년에 아나키스트인 프루동의 경제학설을 비판한 『정치경제학과 정의?프루동 씨의 경제학설 비판』을 첫 경제학 저서로 내놓은 후에 스위스 보(Vaud) 캉통의 조세 문제를 주제로 한 논문 공모전에 응모해 토지의 국유화와 근로소득세의 폐지를 골자로 한 조세 개혁의 이론을 전개했다. 1870년에 보 캉통의 사회주의적인 개혁에 관심을 가진 공직자들로부터 로잔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1870년대에 『순수 정치경제학 원론』을 출판했으며, 이를 통해 영국의 제번스, 오스트리아의 카를 멩거와 함께 경제학사에서 한계혁명의 주창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1883년에는 전문적인 독자들을 위해 『사회적 부의 수학적 이론』을 출판했다. 1894년에는 빌프레도 파레토에게 교수직을 물려주고 은퇴했고, 『사회경제학 연구』(1895)와 『응용 정치경제학 연구』(1898)를 논문집으로 발간했다. 말년에는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자신의 토지 개혁 방안과 자유 무역이 국가 간의 전쟁 위험을 없애 준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의 일반균형 이론은 20세기의 신고전학파 미시경제학의 틀을 만든 파레토, 힉스, 드브뢰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라는 은퇴 후 로잔 인근의 몽트뢰(Montreux)에 거주하며 연구를 계속했고 그의 무덤은 이곳의 클라랑 묘역에 있다.
『사회경제학 연구』는 2010년에야 영문으로 번역되었고, 『응용 정치경제학 연구』는 2005년도에 처음 번역되었을 정도로 그의 전체 경제학 사상의 모습은 사후 100년 동안 부각이 되지 않았다. 발라의 사회경제 사상 전모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리옹대학에 발라가 맡긴 문서들의 아카이브가 발견되면서였다. 이를 토대로 리옹 II 대학의 오귀스트와 레옹 발라 센터에서 14권으로 된 이들 부자의 전집(Auguste et Leon Walras. Œuvres economiques completes)을 발간했고, 레옹 발라의 폭넓은 사회경제 사상은 경제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의 많은 사상사 연구자들의 주제가 되었다. 국제 발라 학회(International Walras Association)가 1997년에 프랑스 리옹에서 결성되었고, 스위스의 로잔대학 사회 및 정치학부에는 발라·파레토 학제 간 연구 센터가 1990년 설립되어 이들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레옹 발라는 1834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에브뢰에서 교육행정관이며 경제학자인 오귀스트 발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학과 미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경제학자인 아버지의 충고로 경제학도의 길을 가게 되었다. 레옹 발라는 일반균형이론의 창시자로서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한 효시로 알려졌고, 그 자신이 이를 중요한 방법론으로 생각했지만 수학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이공계 대입 자격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두 번이나 낙방을 하고, 에콜 데 민에도 청강생 자격으로 들어갔으나 정식 학생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성적에 미달했다. 발라의 강점은 철학적인 전제에서 출발해 연역적인 방법으로 엄밀한 과학적인 절차에 따라 이론을 수립하려는 정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60년에 아나키스트인 프루동의 경제학설을 비판한 『정치경제학과 정의?프루동 씨의 경제학설 비판』을 첫 경제학 저서로 내놓은 후에 스위스 보(Vaud) 캉통의 조세 문제를 주제로 한 논문 공모전에 응모해 토지의 국유화와 근로소득세의 폐지를 골자로 한 조세 개혁의 이론을 전개했다. 1870년에 보 캉통의 사회주의적인 개혁에 관심을 가진 공직자들로부터 로잔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1870년대에 『순수 정치경제학 원론』을 출판했으며, 이를 통해 영국의 제번스, 오스트리아의 카를 멩거와 함께 경제학사에서 한계혁명의 주창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1883년에는 전문적인 독자들을 위해 『사회적 부의 수학적 이론』을 출판했다. 1894년에는 빌프레도 파레토에게 교수직을 물려주고 은퇴했고, 『사회경제학 연구』(1895)와 『응용 정치경제학 연구』(1898)를 논문집으로 발간했다. 말년에는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자신의 토지 개혁 방안과 자유 무역이 국가 간의 전쟁 위험을 없애 준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의 일반균형 이론은 20세기의 신고전학파 미시경제학의 틀을 만든 파레토, 힉스, 드브뢰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라는 은퇴 후 로잔 인근의 몽트뢰(Montreux)에 거주하며 연구를 계속했고 그의 무덤은 이곳의 클라랑 묘역에 있다.
『사회경제학 연구』는 2010년에야 영문으로 번역되었고, 『응용 정치경제학 연구』는 2005년도에 처음 번역되었을 정도로 그의 전체 경제학 사상의 모습은 사후 100년 동안 부각이 되지 않았다. 발라의 사회경제 사상 전모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리옹대학에 발라가 맡긴 문서들의 아카이브가 발견되면서였다. 이를 토대로 리옹 II 대학의 오귀스트와 레옹 발라 센터에서 14권으로 된 이들 부자의 전집(Auguste et Leon Walras. Œuvres economiques completes)을 발간했고, 레옹 발라의 폭넓은 사회경제 사상은 경제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의 많은 사상사 연구자들의 주제가 되었다. 국제 발라 학회(International Walras Association)가 1997년에 프랑스 리옹에서 결성되었고, 스위스의 로잔대학 사회 및 정치학부에는 발라·파레토 학제 간 연구 센터가 1990년 설립되어 이들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