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록 천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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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9/03/06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91128833151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매일 깨달음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 책은 명 왕조의 멸망을 통해 통치 기제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고염무 자신의 정치적 문제의식까지 명료하게 드러내는 정치 개혁론이기도 하다. 전체 1021항목 중에서 고증의 사례, 정치제도, 사회·경제제도, 전통과 풍속, 경학 해석, 역사의식, 박문의 일곱 가지 세부 영역으로 구분해 총 69개 항목을 직접 발췌했다.
Contents
해설지은이에 대해

1. 고증(考證)에 관해
2. 정치(政治)에 관해
3. 사회·경제에 관해
4. 풍속(風俗)에 관해
5. 경학(經學)에 관해
6. 역사(歷史)에 관해
7. 박문(博聞)에 관해

옮긴이에 대해
Author
고염무,윤대식
고염무는 명나라 만력(萬曆) 41년 강소성(江蘇省) 곤산(昆山)에서 출생해 청나라 강희(康熙) 21년 산서성(山西省) 곡옥(曲沃)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강(絳)이고 자(字)는 충청(忠淸)이다. 명나라 멸망 후 이름을 염무(炎武), 자를 영인(寧人)으로 고쳤다. 서명(署名)은 장산용(蔣山傭), 호는 정림(亭林)으로, 정림 선생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청대 고증학의 개조(開祖)로 평가되고 있다.강동 지역의 명망가 출신으로 계조부(繼祖父) 고소불(顧紹?)의 아들인 고동길(顧同吉)이 죽어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자 고소불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수절한 양어머니 왕씨(王氏)에게서 6세부터 ≪소학≫, ≪대학≫을 배우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전통적 명분론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4세에 제생(諸生) 자격을 취득한 후 고염무는 명나라 멸망 때까지 양조부의 교육과 지도하에 고전과 당대의 정치·경제에 대한 심도 깊은 학습을 받았다. 더욱이 초서(抄書)를 강조했던 양조부의 영향은 그의 3대 정치 저작으로 알려진 ≪일지록≫,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 ≪조역지(肇域志)≫ 찬술의 기초로 작용했다고 한다. 한편 명나라 멸망과 함께 청 순치(順治) 원년(1644)부터 약 12년간 두 차례 무장투쟁과 비밀결사인 복사(復社)에도 간여했다. 이후 청조 출사를 거부하고 순치 14년(1657)부터 사망할 때까지 강남 지역을 떠나 “사방을 굽이굽이 2∼3만 리를 왕래하며 또한 기록을 열람한 것만도 1만여 권에 이르도록(往來曲折二三万里, 所覽書又得萬餘卷)” 하북·산동·산서·섬서 등 북방의 옛 제(齊)·노(魯)·연(燕)·조(趙)·진(晉)·진(秦) 지역을 여행하면서 역사와 경학의 고증과 음운 연구 및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평생 ≪일지록≫ 32권, ≪천하군국이병서≫ 100권, ≪음학오서≫ 38권 등 37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고염무는 명나라 만력(萬曆) 41년 강소성(江蘇省) 곤산(昆山)에서 출생해 청나라 강희(康熙) 21년 산서성(山西省) 곡옥(曲沃)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강(絳)이고 자(字)는 충청(忠淸)이다. 명나라 멸망 후 이름을 염무(炎武), 자를 영인(寧人)으로 고쳤다. 서명(署名)은 장산용(蔣山傭), 호는 정림(亭林)으로, 정림 선생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청대 고증학의 개조(開祖)로 평가되고 있다.강동 지역의 명망가 출신으로 계조부(繼祖父) 고소불(顧紹?)의 아들인 고동길(顧同吉)이 죽어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자 고소불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수절한 양어머니 왕씨(王氏)에게서 6세부터 ≪소학≫, ≪대학≫을 배우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전통적 명분론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4세에 제생(諸生) 자격을 취득한 후 고염무는 명나라 멸망 때까지 양조부의 교육과 지도하에 고전과 당대의 정치·경제에 대한 심도 깊은 학습을 받았다. 더욱이 초서(抄書)를 강조했던 양조부의 영향은 그의 3대 정치 저작으로 알려진 ≪일지록≫,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 ≪조역지(肇域志)≫ 찬술의 기초로 작용했다고 한다. 한편 명나라 멸망과 함께 청 순치(順治) 원년(1644)부터 약 12년간 두 차례 무장투쟁과 비밀결사인 복사(復社)에도 간여했다. 이후 청조 출사를 거부하고 순치 14년(1657)부터 사망할 때까지 강남 지역을 떠나 “사방을 굽이굽이 2∼3만 리를 왕래하며 또한 기록을 열람한 것만도 1만여 권에 이르도록(往來曲折二三万里, 所覽書又得萬餘卷)” 하북·산동·산서·섬서 등 북방의 옛 제(齊)·노(魯)·연(燕)·조(趙)·진(晉)·진(秦) 지역을 여행하면서 역사와 경학의 고증과 음운 연구 및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평생 ≪일지록≫ 32권, ≪천하군국이병서≫ 100권, ≪음학오서≫ 38권 등 37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