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광(張顯光)은 1554년(명종 9)에 출생해서 1637년(인조 15)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학자다. 호는 여헌(旅軒)이고 자는 덕회(德晦)다. 경상북도 인동(仁同)에서 태어난 장현광은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황(李滉)의 문인들 사이에서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많은 남인계 학자들을 길러 냈다. 학맥은 퇴계 학파로 분류되지만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이(李珥)의 심성론에 부합하는 바가 많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런 까닭에 그의 학설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서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이라고 평가된다. 그의 생애 기간은 왜란 및 호란의 양란기와 맞물려 있는데 한때 의병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왜란 이후 15년간 여기저기를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자호(自號) 여헌(旅軒)이 암시하듯이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우주 사이의 나그네이며, 나그네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장현광은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 18세에 ≪우주요괄(宇宙要括)≫, 44세에 ≪여헌설(旅軒說)≫을 지었으며, 55세에는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찬술하기 시작했다. 68세에는 ≪경위설(經緯說)≫을, 75세에는 ≪만학요회(晩學要會)≫를, 77세에는 ≪역괘총설(易卦總說)≫을, 78세에는 ≪우주설(宇宙說)≫을, 79세에는 ≪태극설(太極說)≫을, 81세에 ≪도서발휘(圖書發揮)≫를 각각 지었다. 그는 보은현감(報恩縣監), 공조좌랑(工曹佐?), 의성현령(義城縣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대사헌(大司憲)과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장현광(張顯光)은 1554년(명종 9)에 출생해서 1637년(인조 15)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학자다. 호는 여헌(旅軒)이고 자는 덕회(德晦)다. 경상북도 인동(仁同)에서 태어난 장현광은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황(李滉)의 문인들 사이에서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많은 남인계 학자들을 길러 냈다. 학맥은 퇴계 학파로 분류되지만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이(李珥)의 심성론에 부합하는 바가 많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런 까닭에 그의 학설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서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이라고 평가된다. 그의 생애 기간은 왜란 및 호란의 양란기와 맞물려 있는데 한때 의병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왜란 이후 15년간 여기저기를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자호(自號) 여헌(旅軒)이 암시하듯이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우주 사이의 나그네이며, 나그네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장현광은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 18세에 ≪우주요괄(宇宙要括)≫, 44세에 ≪여헌설(旅軒說)≫을 지었으며, 55세에는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찬술하기 시작했다. 68세에는 ≪경위설(經緯說)≫을, 75세에는 ≪만학요회(晩學要會)≫를, 77세에는 ≪역괘총설(易卦總說)≫을, 78세에는 ≪우주설(宇宙說)≫을, 79세에는 ≪태극설(太極說)≫을, 81세에 ≪도서발휘(圖書發揮)≫를 각각 지었다. 그는 보은현감(報恩縣監), 공조좌랑(工曹佐?), 의성현령(義城縣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대사헌(大司憲)과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