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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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8/08/03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91128830730
Categories 인문 > 철학/사상
Description
서양 과학을 모르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우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조선 시대 성리학자인 장현광은 우주가 ‘이(理)’의 원리에 따라, ‘기(氣)’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서구 사상이 들어오기 전 순수한 유학 사상을 바탕으로 17세기 조선 지식인이 생각한 우주 구조론과 생성론, 그리고 그 우주 안에서 인간이 행해야 할 도리를 밝히고 있다.
Contents
이(理)와 기(氣), 체(體)와 용(用)이 행하는 끝없는 묘법(理氣體用無窮之妙)
물품의 무리가 서로 갖춰지는 이치(品彙互備之理)
역서(易書)에서의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의 차서와 조화(造化) 과정에서의 음양(陰陽)·오행(五行) 및 한서(寒暑)·주야(晝夜)의 변화(易書之太極·兩儀·四象·八卦之序, 造化之陰陽五行·寒暑晝夜之變)
붙임 : 동자의 물음에 답함(附答童問)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Author
장현광
장현광(張顯光)은 1554년(명종 9)에 출생해서 1637년(인조 15)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학자다. 호는 여헌(旅軒)이고 자는 덕회(德晦)다. 경상북도 인동(仁同)에서 태어난 장현광은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황(李滉)의 문인들 사이에서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많은 남인계 학자들을 길러 냈다. 학맥은 퇴계 학파로 분류되지만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이(李珥)의 심성론에 부합하는 바가 많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런 까닭에 그의 학설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서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이라고 평가된다. 그의 생애 기간은 왜란 및 호란의 양란기와 맞물려 있는데 한때 의병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왜란 이후 15년간 여기저기를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자호(自號) 여헌(旅軒)이 암시하듯이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우주 사이의 나그네이며, 나그네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장현광은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 18세에 ≪우주요괄(宇宙要括)≫, 44세에 ≪여헌설(旅軒說)≫을 지었으며, 55세에는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찬술하기 시작했다. 68세에는 ≪경위설(經緯說)≫을, 75세에는 ≪만학요회(晩學要會)≫를, 77세에는 ≪역괘총설(易卦總說)≫을, 78세에는 ≪우주설(宇宙說)≫을, 79세에는 ≪태극설(太極說)≫을, 81세에 ≪도서발휘(圖書發揮)≫를 각각 지었다. 그는 보은현감(報恩縣監), 공조좌랑(工曹佐?), 의성현령(義城縣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대사헌(大司憲)과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장현광(張顯光)은 1554년(명종 9)에 출생해서 1637년(인조 15)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학자다. 호는 여헌(旅軒)이고 자는 덕회(德晦)다. 경상북도 인동(仁同)에서 태어난 장현광은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황(李滉)의 문인들 사이에서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많은 남인계 학자들을 길러 냈다. 학맥은 퇴계 학파로 분류되지만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이(李珥)의 심성론에 부합하는 바가 많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런 까닭에 그의 학설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서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이라고 평가된다. 그의 생애 기간은 왜란 및 호란의 양란기와 맞물려 있는데 한때 의병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왜란 이후 15년간 여기저기를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자호(自號) 여헌(旅軒)이 암시하듯이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우주 사이의 나그네이며, 나그네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장현광은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 18세에 ≪우주요괄(宇宙要括)≫, 44세에 ≪여헌설(旅軒說)≫을 지었으며, 55세에는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찬술하기 시작했다. 68세에는 ≪경위설(經緯說)≫을, 75세에는 ≪만학요회(晩學要會)≫를, 77세에는 ≪역괘총설(易卦總說)≫을, 78세에는 ≪우주설(宇宙說)≫을, 79세에는 ≪태극설(太極說)≫을, 81세에 ≪도서발휘(圖書發揮)≫를 각각 지었다. 그는 보은현감(報恩縣監), 공조좌랑(工曹佐?), 의성현령(義城縣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대사헌(大司憲)과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