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백과사전인 『고금주』의 증보 확장판이다. 당나라 때까지의 다양한 명물과 제도를 보다 더 구체적이고 폭넓게 다루었다. 특히 당나라 때의 기물과 복식, 여자들의 머리 모양과 장식에 대한 설명이 대폭 증보되었고, 옛 전적을 이용해 근거를 밝혀 신빙성을 강화했다. 『고금주』와 함께 고대 문물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의 찬자 마호(馬縞, 854 또는 857∼936)는 자(字)와 관적(貫籍)이 미상이다. 당나라 말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고 발췌과(拔萃科)에도 등제했다. 후량(後梁)에서는 태상수찬(太常修撰)·상서랑(尙書郞)·참지례원사(參知禮院事)를 역임한 뒤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전임되었다. 후당(後唐) 장종(莊宗) 때는 중서사인(中書舍人)·형부시랑(刑部侍?)·권판태상경(權判太常卿)을 지냈으며, 명종(明宗) 때는 사건에 연루되어 수주사마(綏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비서감(秘書監)·태자빈객(太子賓客)에 임명되었고 호부시랑(戶部侍?)과 병부시랑(兵部侍?)으로 전임된 후 국자좨주(國子祭酒)에서 벼슬을 마쳤다. 80세(또는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중화고금주』에서 “국자감 태학박사(國子監太學博士)”라고 제 한 것은 아마도 그의 초기의 벼슬로 보인다. 마호는 유술(儒術)에 정통했고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는데, 『전당문(全唐文)』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문장 4편은 모두 예의(禮儀)를 고석(考釋)한 글들이다. 『구오대사(舊五代史)』 권71과 『신오대사』 권55에 그의 전(傳)이 실려 있다.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의 찬자 마호(馬縞, 854 또는 857∼936)는 자(字)와 관적(貫籍)이 미상이다. 당나라 말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고 발췌과(拔萃科)에도 등제했다. 후량(後梁)에서는 태상수찬(太常修撰)·상서랑(尙書郞)·참지례원사(參知禮院事)를 역임한 뒤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전임되었다. 후당(後唐) 장종(莊宗) 때는 중서사인(中書舍人)·형부시랑(刑部侍?)·권판태상경(權判太常卿)을 지냈으며, 명종(明宗) 때는 사건에 연루되어 수주사마(綏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비서감(秘書監)·태자빈객(太子賓客)에 임명되었고 호부시랑(戶部侍?)과 병부시랑(兵部侍?)으로 전임된 후 국자좨주(國子祭酒)에서 벼슬을 마쳤다. 80세(또는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중화고금주』에서 “국자감 태학박사(國子監太學博士)”라고 제 한 것은 아마도 그의 초기의 벼슬로 보인다. 마호는 유술(儒術)에 정통했고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는데, 『전당문(全唐文)』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문장 4편은 모두 예의(禮儀)를 고석(考釋)한 글들이다. 『구오대사(舊五代史)』 권71과 『신오대사』 권55에 그의 전(傳)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