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정리한 노나라의 사서(史書) 『춘추』는 유가 5경 중 하나로, 역대 왕과 선비들의 길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간략하게 기록된 『춘추』를 연구해 각각의 관점에서 해설한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춘추좌씨전』을 춘추 삼전이라고 한다. 『춘추곡량전』은 춘추 삼전 중 가장 민본주의 사상을 드러낸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중시해 그로써 후세에 표준을 드리우고자 했던 곡량학파의 이상을 살필 수 있다.
『곡량전』의 작자에 대해서는 <예문지>에 ‘『곡량전』 11권, 곡량자(穀梁子), 노나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안사고(顔師古)는 그 이름을 ‘희(喜)’라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전대소(錢大昭)는 『한서변의(漢書辨疑)』에서 민본(?本) 『한서』를 고찰하고 지금 판본에 적힌 이름 ‘희’는 ‘가(嘉)’로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환담(桓譚), 응소(應?), 채옹(蔡邕), 육덕명(陸德明)은 미신(?信)의 말을 인용하며 ‘적(赤)’이라고 했다. 왕충(王充)은 ‘치(?)’,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과 『원화성찬(元和姓纂)』에는 시자(尸子)의 말을 인용해 ‘숙(?)’이라고 되어 있다. 양사훈(楊士勛)의 『곡량전소(穀梁傳疏)』에는 ‘숙(淑)’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에게 6개의 이름이 있는 것은 『곡량전』을 한 사람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없으며 곡량씨 집안의 학문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게다가 선진(先秦) 시기 문헌 대부분이 개인이 아닌 학파의 집체 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곡량전』을 특정 개인의 작품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곡량전』의 작자에 대해서는 <예문지>에 ‘『곡량전』 11권, 곡량자(穀梁子), 노나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안사고(顔師古)는 그 이름을 ‘희(喜)’라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전대소(錢大昭)는 『한서변의(漢書辨疑)』에서 민본(?本) 『한서』를 고찰하고 지금 판본에 적힌 이름 ‘희’는 ‘가(嘉)’로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환담(桓譚), 응소(應?), 채옹(蔡邕), 육덕명(陸德明)은 미신(?信)의 말을 인용하며 ‘적(赤)’이라고 했다. 왕충(王充)은 ‘치(?)’, 완효서(阮孝緖)의 『칠록(七錄)』과 『원화성찬(元和姓纂)』에는 시자(尸子)의 말을 인용해 ‘숙(?)’이라고 되어 있다. 양사훈(楊士勛)의 『곡량전소(穀梁傳疏)』에는 ‘숙(淑)’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에게 6개의 이름이 있는 것은 『곡량전』을 한 사람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없으며 곡량씨 집안의 학문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게다가 선진(先秦) 시기 문헌 대부분이 개인이 아닌 학파의 집체 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곡량전』을 특정 개인의 작품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