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당한화(玉堂閑話)』는 오대(五代)의 문인 왕인유(王仁裕)가 ‘옥당’, 즉 한림원(翰林院)에서 동료들과 한담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부터, 민담과 야화, 괴담 등은 물론, 문학, 지리, 생물 등 학문적인 내용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원전은 현재 전하지 않으나, 김장환 교수가 후대의 여러 전적에 실린 일문을 수집, 교감해 183조로 정리하고 우리말로 옮겼다. 세계 초역이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의 찬자 왕인유(王仁裕, 880∼956)는 오대(五代)의 문인으로, 자는 덕련(德輦)이고 천수[天水 :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톈수이시(天水市)]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했고 사냥을 일삼다가 스물다섯 살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해, 문장으로 진롱[秦? : 지금의 산시성(陝西省)·간쑤성] 지역에 이름이 알려졌다. 당나라 말에 진주절도판관(秦州節度判官)이 되었으며, 진주가 전촉(前蜀)에 편입되자 중서사인(中書舍人)과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그 후로 후당(後唐)에서는 진주절도판관·도관낭중(都官郞中)·한림학사를 지냈고, 후진(後晉)에서는 사봉좌사낭중(司封左司郞中)·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후한(後漢)에서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호부상서(戶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태자소보(太子少保)를 지냈다. 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3년(956)에 77세로 생을 마쳤고,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추증되었다.왕인유는 시문(詩文)에 능했고 음률에 밝았으며, 화응(和凝)과 함께 오대 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필기 저작으로 『개원천보유사』 외에 『옥당한화(玉堂閑話)』와 『당말견문록(唐末見聞錄)』 등을 찬했으며, 시문집으로 『서강집(西江集)』 100권을 찬했지만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의 전(傳)은 『신오대사(新五代史)』 권57 「잡전(雜傳)」에 실려 있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의 찬자 왕인유(王仁裕, 880∼956)는 오대(五代)의 문인으로, 자는 덕련(德輦)이고 천수[天水 :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톈수이시(天水市)]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했고 사냥을 일삼다가 스물다섯 살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해, 문장으로 진롱[秦? : 지금의 산시성(陝西省)·간쑤성] 지역에 이름이 알려졌다. 당나라 말에 진주절도판관(秦州節度判官)이 되었으며, 진주가 전촉(前蜀)에 편입되자 중서사인(中書舍人)과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그 후로 후당(後唐)에서는 진주절도판관·도관낭중(都官郞中)·한림학사를 지냈고, 후진(後晉)에서는 사봉좌사낭중(司封左司郞中)·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후한(後漢)에서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호부상서(戶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태자소보(太子少保)를 지냈다. 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3년(956)에 77세로 생을 마쳤고,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추증되었다.왕인유는 시문(詩文)에 능했고 음률에 밝았으며, 화응(和凝)과 함께 오대 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필기 저작으로 『개원천보유사』 외에 『옥당한화(玉堂閑話)』와 『당말견문록(唐末見聞錄)』 등을 찬했으며, 시문집으로 『서강집(西江集)』 100권을 찬했지만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의 전(傳)은 『신오대사(新五代史)』 권57 「잡전(雜傳)」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