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시기 북경 지역의 세시 풍속을 월별로 정리한 책이다. 주요 내용은 풍속·유람·물산·기예, 묘시 등으로 음력 정월부터 12월까지 총 145조를 다루었다. 설과 단오는 물론, 봉숭아물 들이기, 제기 차기, 썰매 타기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풍속도 보인다. 한중 양국의 세시 풍속 비교 연구 발전에 초석이 될 작품이다.
부찰돈숭(富察敦崇, 1855∼1922)은 만주 귀족의 후예로 자는 예신(禮臣), 호는 철사도인(鐵獅道人)이다. 그는 대대로 돈혜백(敦惠伯)의 지위를 세습해 온 승간당공(承簡堂公)의 둘째 아들이며 만주 세가(世家)인 태부대학사(太傅大學士) 마문목공(馬文穆公)의 먼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나 족인(族人)으로 회피(廻避)당해 우도(牛刀)를 시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후 관례에 따라 관직을 받아 동삼성(東三省)의 도원(都員)을 지냈다. 퇴청 후에는 서사(書史)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어 국조[國朝, 청조(淸朝)]의 옛 역사 제도의 전고(典故)에 관해 그 본원(本源)을 깊게 탐구했다. 일찍이 육군부낭중(陸軍部郞中)·광서사은부지부(廣西思恩府知府) 등을 거쳐 선통(宣統) 2년 조정의 명을 받들어 북경·찰합이(察哈爾)·하북(河北)·호북(湖北)·강소(江蘇)·절강(浙江) 등지의 군대·학교·공장 등을 조사하는 사무를 보았다. 이듬해 7월 병가를 얻어 북경으로 돌아와 혁명을 피해 두문불출했다. 그는 평생 문사를 좋아해 풍부한 저술을 남겼는데 『융유황태후대사기(隆裕皇太后大事記)』·『남행시초(南行詩草)』·『자등관시초(紫藤館詩草)』·『예창쇄기(藝??記)』·『화호집문초(畵虎集文抄)』·『(경자)도문기변삼십수절구[(庚子)都門紀變三十首?句]』·『황실견문록(皇室見聞錄)』·『부찰유문록(富察遺聞錄)』 등이 전한다.
부찰돈숭(富察敦崇, 1855∼1922)은 만주 귀족의 후예로 자는 예신(禮臣), 호는 철사도인(鐵獅道人)이다. 그는 대대로 돈혜백(敦惠伯)의 지위를 세습해 온 승간당공(承簡堂公)의 둘째 아들이며 만주 세가(世家)인 태부대학사(太傅大學士) 마문목공(馬文穆公)의 먼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나 족인(族人)으로 회피(廻避)당해 우도(牛刀)를 시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후 관례에 따라 관직을 받아 동삼성(東三省)의 도원(都員)을 지냈다. 퇴청 후에는 서사(書史)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어 국조[國朝, 청조(淸朝)]의 옛 역사 제도의 전고(典故)에 관해 그 본원(本源)을 깊게 탐구했다. 일찍이 육군부낭중(陸軍部郞中)·광서사은부지부(廣西思恩府知府) 등을 거쳐 선통(宣統) 2년 조정의 명을 받들어 북경·찰합이(察哈爾)·하북(河北)·호북(湖北)·강소(江蘇)·절강(浙江) 등지의 군대·학교·공장 등을 조사하는 사무를 보았다. 이듬해 7월 병가를 얻어 북경으로 돌아와 혁명을 피해 두문불출했다. 그는 평생 문사를 좋아해 풍부한 저술을 남겼는데 『융유황태후대사기(隆裕皇太后大事記)』·『남행시초(南行詩草)』·『자등관시초(紫藤館詩草)』·『예창쇄기(藝??記)』·『화호집문초(畵虎集文抄)』·『(경자)도문기변삼십수절구[(庚子)都門紀變三十首?句]』·『황실견문록(皇室見聞錄)』·『부찰유문록(富察遺聞錄)』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