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책은 우리 민담 ‘녹두영감(또는 팥이영감) 설화’를 새로이 풀어낸 작품입니다. 민담은 보통 선악과 강약의 구분이 뚜렷하고 선하고 약자가 악한 강자를 이기는 줄거리를 갖지요. 그런데 녹두영감 설화는 조금 다릅니다. 다투는 양쪽의 강약이 비등비등한데다가,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판가름하기도 애매합니다. 각편에 따라서는, 흔히 선한 약자로 여겨지는 토끼가 아주 잔혹하게 영감을 응징하는 화소를 갖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는 선과 악을 떠나 생존을 위해 서로 그악스레 덤벼드는 투쟁기입니다. 결말은 그다지 악해 보이지 않는 녹두영감의 처절한 패망이지요. 민담의 공식을 깬 민담, 그래서 이 묘한 이야기는 길고 복잡한 여운을 남깁니다. 어째서 그럴까, 사람들의 어떤 의식이 이 이야기를 지어낸 걸까...?
여운의 끝을 붙잡고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이야기로구나, 녹두영감이 대리하는 인간과 토끼들이 상징하는 야생은 어쩔 수 없이 끝없는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 관계일 테니까. 생존이라는 운명적 과제 앞에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처지일 테니까. 그러나 이것은 또한 염치 있는 이야기구나. 양보 없는 싸움에서 끝내 이기는 자는 인간이기 마련이니, 이야기 속에서나마 져 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담았으니까. 그리하여 이것은 결국 한풀이 굿이겠구나. 쫓겨난 것들의 한과 쫓아낸 자의 죄스러움을 풀어, 이 냉엄한 운명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을 테니까.
Author
강미애
대학에서 디자인공학을, 작가공동체 HILLS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녹두영감과 토끼》는 쓰고 그린 첫 번째 그림책이다. “뒷산의 토끼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하길 바랍니다.”
대학에서 디자인공학을, 작가공동체 HILLS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녹두영감과 토끼》는 쓰고 그린 첫 번째 그림책이다. “뒷산의 토끼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