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유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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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5/07/20
Pages/Weight/Size 152*223*30mm
ISBN 9788998742515
Categories 종교 > 불교
Description
'조선불교유신론'(1913년 불교서관)은 만해 한용운의 저작으로, 당시 조선 불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개혁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여 조선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책이다.

Ⅰ장은 '조선불교유신론'의 해제이다. 역자는 저자 한용운의 생애와 저술 당시의 시대적 상항에 대해 자세히 고찰했다. 또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만해 사상의 근간이 된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에 대해서도 살폈다.

Ⅱ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을 번역한 부분인데, 한용운은 조선불교 개혁을 토로하고, 불교는 미신이 아니라 고금동서의 모든 철학을 종합·포섭하고 있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불교의 이상(理想)은 평등주의 내지는 구세주의(救世主義)에 있는 것으로 이는 서양의 자유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역설했다.

인류 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불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신적인 요소가 있는 탱화와 번잡한 의식들을 버려야 하고, 승려도 체계적 교육을 받아야 하며,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원의 주지 선출 문제, 교단 조직과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Ⅲ장은 ['조선불교유신론' 의 번역과 그 연구(부제: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이다. 여기서 역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새번역의 필요성과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비롯해 만해의 일본행이 만해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부록에는 '조선불교유신론' 의 영인본이 실렸다.
Contents
Ⅰ장. 『조선불교유신론』 해제

1. 저자 한용운(韓龍雲)에 대하여…………………………………………… 9
2. 저술의 시대 상황적 배경: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 12
3.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 14
4. 만해의 사상적 배경: 량치차오(梁啓超)와 사회진화론……………… 17

Ⅱ장.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역주(譯註)

1. 서(序)… …………………………………………………………………………… 21
2. 서론(緖論)……………………………………………………………………………… 23
3. 불교의 성질을 논함(論佛敎之性質)……………………………………… 29
4. 불교의 주의(主義)를 논함(論佛敎之主義)……………………………… 55
5. 불교의 유신(維新)은 먼저 파괴부터 해야 함을 논함
(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 64
6. 승려의 교육을 논함(論僧侶之敎育)……………………………………… 68
7. 참선을 논함(論參禪)…………………………………………………………… 84
8. 염불당 폐지를 논함(論廢念佛堂)………………………………………… 95
9. 포교를 논함(論布敎)… ……………………………………………………… 106
10. 사원의 위치를 논함(論寺院位置)… …………………………………… 120
11. 불가(佛家)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를 논함(論佛家崇拜之塑繪)…… 143
12. 불가(佛家)의 각종 의식을 논함(論佛家之各種儀式)………………… 161
13. 승려의 인권회복은 반드시 생산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논함
(論僧侶之克復人權必自生利始)… ……………………………………… 169
14. 불교의 앞날이 승니(僧尼)의 결혼여부와 관련됨을 논함
(論佛敎之前途가 關於僧尼嫁娶與否者)……………………………………… 182
15. 사원 주직(住職)의 선거법을 논함(論寺院住職選擧法)………… 206
16. 승려의 단결을 논함(論僧侶之團體)… ………………………………… 212
17. 사원의 통할을 논함(論寺院統轄)… …………………………………… 232
18. 결론(結論)… ……………………………………………………………… 238

Ⅲ장. 『조선불교유신론』의 번역과 그 연구
- 만해학(萬海學)의 ‘빛과 그림자’ -

1. 『조선불교유신론』 새 번역의 필요성… ………………………………… 245
2. 『조선불교유신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248
3. 만해의 일본행과 『조선불교유신론』의 관계…………………………… 251
4. 본 번역본에 대하여…………………………………………………………… 259

『조선불교유신론』 영인본 / 별면
Author
한용운,최경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