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점현토역주(標點懸吐譯注) 비위론(脾胃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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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4/18
Pages/Weight/Size 195*265*18mm
ISBN 9788998038847
Categories 대학교재 > 의약학/간호 계열
Description
『脾胃論』은 李東垣이 68세일 때에 간행한 『內外傷辨惑論』을 보완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70세 때에 간행한 책이다. 羅天益의 後序에 따르면 『內經』과 『難經』과 『傷寒論』은 脾와 胃를 손상시킨 病에 대하여 설명을 해둔 것이 있기는 하지만 疏略하고 詳細하지 않았기 때문에 李東垣이 『內外傷辨惑論』과 『脾胃論』을 만들어서 그것을 보충하여 설명하였다고 한다.
Contents
앞세우는 말_5
凡例 _11
【提要】_13
【原序】_15
脾胃論卷上_18
【脾胃虛實傳變論】_18
【藏氣法時升降浮?補?之圖】_33
【脾胃勝衰論】_36
補脾胃瀉?火升陽湯_62
【肺之脾胃虛論】_65
升陽益胃湯_65
【君臣佐使法】_68
【分經隨病制方】_77
通氣防風湯_77
?活勝濕湯_78
【用藥宜禁論】_83
脾胃論卷中_100
【氣運衰旺圖說】_100
【?食勞倦所傷始?熱中論】_104
補中益氣湯_108
【脾胃虛弱隨時?病隨病制方】_118
?耆人參湯_119
除風濕活湯_130
調中益氣湯_132
【長夏濕熱胃困尤甚用?暑益氣湯論】_139
?暑益氣湯_142
【隨時加減用藥法】_150
【腸?下血論】_159
?血地?湯_159
升陽除濕防風湯_162
【脾胃虛不可妄用吐藥論】_164
【安養心神調治脾胃論】_169
【凡治病當問其所便】_171
【胃氣下溜五臟氣皆亂其?病互相出見論】174
【?病治陽陽病治?】_181
【三焦元氣衰旺】_187
脾胃論卷下_189
【大腸小腸五臟皆屬於胃胃虛則俱病論】_189
【脾胃虛則九竅不通論】_193
【胃虛臟腑經絡皆無所受氣而俱病論】_200
【胃虛元氣不足諸病所生論】_207
【忽肥忽瘦論】_209
【天地?陽生殺之理在升降浮?之間論】_212
【?陽壽夭論】_216
【五臟之氣交變論】_219
【?陽升降論】_222
【調理脾胃治驗】_226
【治法用藥若不明升降浮?差互反損論】_226
?神益氣湯_231
半夏白?天麻湯_234
人參芍藥湯_236
麻?人參芍藥湯_237
升陽散火湯_238
安胃湯_239
?胃散_239
?陽湯_240
胃風湯_241
【陽明病濕勝自汗論】_243
調衛湯_244
【濕熱成?肺金受邪論】_246
?燥湯_246
助陽和血補氣湯_247
升陽湯_247
升陽除濕湯_248
益胃湯_248
生薑和中湯_249
强胃湯_249
?胃湯_250
和中丸_250
藿香安胃散_251
異功散_251
【?食傷脾論】_253
五?散_254
【論?酒過傷】_255
葛花解?湯_256
枳?丸_257
橘皮枳?丸_258
半夏枳?丸_259
木香乾薑枳?丸_260
木香人參生薑枳?丸260
和中丸_261
交泰丸_262
三稜消積丸_263
備急丹_264
神保丸_265
雄?聖?子_266
??枳實丸_267
感應丸_268
神應丸_271
白?安胃散_272
聖?子_273
當歸和血散_273
訶梨勒丸_274
【脾胃損在調?食適寒?】_275
胃風湯_278
三?丸_279
白?散_280
加減平胃散_280
散滯氣湯_283
通幽湯_284
潤腸丸_284
氣除燥湯_285
丁香茱萸湯_285
草豆?丸_286
神聖復氣湯_289
【脾胃將理法】_293
【攝養】_296
【?欲】_299
【省言箴】_301
【脾胃論後序】_302
처방색인(處方索引)_305
Author
이동원,소재진
이동원(李東垣)은 금(金)나라 세종(世宗) 때인 서기 1180년에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의 정정현(正定縣)에 해당하는 진정(眞定)에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술을 업(業)으로 익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왕약허(王若虛, 1174∼1243)에게서 『논어』와 『맹자』를 배우고 풍벽(馮璧, 1162∼1240)에게서 『춘추』를 배우는 등 주로 유학을 익혔는데, 어머니인 왕씨(王氏)가 병들었을 때에 고을 안의 여러 의사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여 끝내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이를 통렬하게 슬퍼하다가 역수(易水)의 결고노인(潔古老人)·장원소(張元素)의 의술이 천하에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서 황금과 비단을 바치고 나아가 배웠다.

23세이던 금나라 장종(章宗) 때에 재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어서 제원현(濟源縣)의 세금을 감독할 때에 지금의 유행성이하선염에 해당하는 대두천행(大頭天行)이라는 병이 유행하여 의사들이 사하법(瀉下法)을 반복하여 사용하여 연이어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보제소독음자(普濟消毒?子)라는 처방을 창안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목각에 새겨 공개하니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의사로 자처하지 않아서 사람들도 이동원이 의술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금나라 선종(宣宗) 때인 1232년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몽고군을 피해 지금의 개봉시(開封市)에 해당하는 변량(?梁)으로 피난을 가 있을 때부터 마침내 의사로서 공경(公卿)들의 사이를 오가면서 의사로서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53세이던 1232년 금나라 애종(哀宗) 때에 몽고군의 공격으로 변량(?梁)이 위태로워져서 변량을 탈출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서 동평(東平)으로 갔는데, 당시에 변량 사람 중에서 병에 걸리지 않은 자가 만 명 중에 한두 명도 없었고, 병들어 죽은 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의 초고를 완성하였지만 출간하지 않고 16년 동안 선반 위에 묶어 두었다가, 향리로 돌아온 지 3년 만인 서기 1247년 즉 그의 나이 68세일 때에 곤륜(崑崙)의 범(范) 존사(尊師)의 권유로 병든 몸을 지탱하며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이동원은 이 책을 완성하고 불과 4년 뒤인 서기 1251년에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동원의 이름은 고(?)이고 자(字_는 명지(明之)이니, 자호(自號)로 삼은 동원노인(東垣老人)의 동원(東垣)은 그의 고향인 진정(眞定)의 옛 이름이다.

이동원 하면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과 내상병(內傷病)이 머리에 떠오르겠지만, 『원사(元史)』에 따르면 이동원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내상(內傷)보다 상한(傷寒)과 옹저(癰疽)와 안목(眼目)의 병으로 더 유명하였다고 한다. 원호문(元好問)의 『유산집(遺山集)』에 보이는 〈상한회요인(傷寒會要引)〉에 따르면 금나라가 멸망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1238년 즉 그의 나이가 59세일 때에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30여만 자나 되는 상한(傷寒)에 관한 방대한 책을 저술하여 아들인 집중(執中)을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던 원호문(元好問)에게 보내서 서문을 요청하여 간행하였다고 하니, 이동원 자신도 외감(外感)과 관련된 저술인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책에 더 큰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동원(李東垣)은 금(金)나라 세종(世宗) 때인 서기 1180년에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의 정정현(正定縣)에 해당하는 진정(眞定)에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술을 업(業)으로 익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왕약허(王若虛, 1174∼1243)에게서 『논어』와 『맹자』를 배우고 풍벽(馮璧, 1162∼1240)에게서 『춘추』를 배우는 등 주로 유학을 익혔는데, 어머니인 왕씨(王氏)가 병들었을 때에 고을 안의 여러 의사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여 끝내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이를 통렬하게 슬퍼하다가 역수(易水)의 결고노인(潔古老人)·장원소(張元素)의 의술이 천하에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서 황금과 비단을 바치고 나아가 배웠다.

23세이던 금나라 장종(章宗) 때에 재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어서 제원현(濟源縣)의 세금을 감독할 때에 지금의 유행성이하선염에 해당하는 대두천행(大頭天行)이라는 병이 유행하여 의사들이 사하법(瀉下法)을 반복하여 사용하여 연이어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보제소독음자(普濟消毒?子)라는 처방을 창안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목각에 새겨 공개하니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의사로 자처하지 않아서 사람들도 이동원이 의술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금나라 선종(宣宗) 때인 1232년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몽고군을 피해 지금의 개봉시(開封市)에 해당하는 변량(?梁)으로 피난을 가 있을 때부터 마침내 의사로서 공경(公卿)들의 사이를 오가면서 의사로서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53세이던 1232년 금나라 애종(哀宗) 때에 몽고군의 공격으로 변량(?梁)이 위태로워져서 변량을 탈출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서 동평(東平)으로 갔는데, 당시에 변량 사람 중에서 병에 걸리지 않은 자가 만 명 중에 한두 명도 없었고, 병들어 죽은 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의 초고를 완성하였지만 출간하지 않고 16년 동안 선반 위에 묶어 두었다가, 향리로 돌아온 지 3년 만인 서기 1247년 즉 그의 나이 68세일 때에 곤륜(崑崙)의 범(范) 존사(尊師)의 권유로 병든 몸을 지탱하며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이동원은 이 책을 완성하고 불과 4년 뒤인 서기 1251년에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동원의 이름은 고(?)이고 자(字_는 명지(明之)이니, 자호(自號)로 삼은 동원노인(東垣老人)의 동원(東垣)은 그의 고향인 진정(眞定)의 옛 이름이다.

이동원 하면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과 내상병(內傷病)이 머리에 떠오르겠지만, 『원사(元史)』에 따르면 이동원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내상(內傷)보다 상한(傷寒)과 옹저(癰疽)와 안목(眼目)의 병으로 더 유명하였다고 한다. 원호문(元好問)의 『유산집(遺山集)』에 보이는 〈상한회요인(傷寒會要引)〉에 따르면 금나라가 멸망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1238년 즉 그의 나이가 59세일 때에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30여만 자나 되는 상한(傷寒)에 관한 방대한 책을 저술하여 아들인 집중(執中)을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던 원호문(元好問)에게 보내서 서문을 요청하여 간행하였다고 하니, 이동원 자신도 외감(外感)과 관련된 저술인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책에 더 큰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