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李東垣)은 금(金)나라 세종(世宗) 때인 서기 1180년에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의 정정현(正定縣)에 해당하는 진정(眞定)에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술을 업(業)으로 익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왕약허(王若虛, 1174∼1243)에게서 『논어』와 『맹자』를 배우고 풍벽(馮璧, 1162∼1240)에게서 『춘추』를 배우는 등 주로 유학을 익혔는데, 어머니인 왕씨(王氏)가 병들었을 때에 고을 안의 여러 의사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여 끝내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이를 통렬하게 슬퍼하다가 역수(易水)의 결고노인(潔古老人)·장원소(張元素)의 의술이 천하에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서 황금과 비단을 바치고 나아가 배웠다.
23세이던 금나라 장종(章宗) 때에 재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어서 제원현(濟源縣)의 세금을 감독할 때에 지금의 유행성이하선염에 해당하는 대두천행(大頭天行)이라는 병이 유행하여 의사들이 사하법(瀉下法)을 반복하여 사용하여 연이어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보제소독음자(普濟消毒?子)라는 처방을 창안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목각에 새겨 공개하니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의사로 자처하지 않아서 사람들도 이동원이 의술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금나라 선종(宣宗) 때인 1232년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몽고군을 피해 지금의 개봉시(開封市)에 해당하는 변량(?梁)으로 피난을 가 있을 때부터 마침내 의사로서 공경(公卿)들의 사이를 오가면서 의사로서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53세이던 1232년 금나라 애종(哀宗) 때에 몽고군의 공격으로 변량(?梁)이 위태로워져서 변량을 탈출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서 동평(東平)으로 갔는데, 당시에 변량 사람 중에서 병에 걸리지 않은 자가 만 명 중에 한두 명도 없었고, 병들어 죽은 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의 초고를 완성하였지만 출간하지 않고 16년 동안 선반 위에 묶어 두었다가, 향리로 돌아온 지 3년 만인 서기 1247년 즉 그의 나이 68세일 때에 곤륜(崑崙)의 범(范) 존사(尊師)의 권유로 병든 몸을 지탱하며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이동원은 이 책을 완성하고 불과 4년 뒤인 서기 1251년에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동원의 이름은 고(?)이고 자(字_는 명지(明之)이니, 자호(自號)로 삼은 동원노인(東垣老人)의 동원(東垣)은 그의 고향인 진정(眞定)의 옛 이름이다.
이동원 하면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과 내상병(內傷病)이 머리에 떠오르겠지만, 『원사(元史)』에 따르면 이동원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내상(內傷)보다 상한(傷寒)과 옹저(癰疽)와 안목(眼目)의 병으로 더 유명하였다고 한다. 원호문(元好問)의 『유산집(遺山集)』에 보이는 〈상한회요인(傷寒會要引)〉에 따르면 금나라가 멸망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1238년 즉 그의 나이가 59세일 때에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30여만 자나 되는 상한(傷寒)에 관한 방대한 책을 저술하여 아들인 집중(執中)을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던 원호문(元好問)에게 보내서 서문을 요청하여 간행하였다고 하니, 이동원 자신도 외감(外感)과 관련된 저술인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책에 더 큰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동원(李東垣)은 금(金)나라 세종(世宗) 때인 서기 1180년에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의 정정현(正定縣)에 해당하는 진정(眞定)에서 거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술을 업(業)으로 익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왕약허(王若虛, 1174∼1243)에게서 『논어』와 『맹자』를 배우고 풍벽(馮璧, 1162∼1240)에게서 『춘추』를 배우는 등 주로 유학을 익혔는데, 어머니인 왕씨(王氏)가 병들었을 때에 고을 안의 여러 의사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여 끝내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이를 통렬하게 슬퍼하다가 역수(易水)의 결고노인(潔古老人)·장원소(張元素)의 의술이 천하에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서 황금과 비단을 바치고 나아가 배웠다.
23세이던 금나라 장종(章宗) 때에 재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어서 제원현(濟源縣)의 세금을 감독할 때에 지금의 유행성이하선염에 해당하는 대두천행(大頭天行)이라는 병이 유행하여 의사들이 사하법(瀉下法)을 반복하여 사용하여 연이어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보제소독음자(普濟消毒?子)라는 처방을 창안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목각에 새겨 공개하니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의사로 자처하지 않아서 사람들도 이동원이 의술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금나라 선종(宣宗) 때인 1232년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몽고군을 피해 지금의 개봉시(開封市)에 해당하는 변량(?梁)으로 피난을 가 있을 때부터 마침내 의사로서 공경(公卿)들의 사이를 오가면서 의사로서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53세이던 1232년 금나라 애종(哀宗) 때에 몽고군의 공격으로 변량(?梁)이 위태로워져서 변량을 탈출하여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서 동평(東平)으로 갔는데, 당시에 변량 사람 중에서 병에 걸리지 않은 자가 만 명 중에 한두 명도 없었고, 병들어 죽은 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의 초고를 완성하였지만 출간하지 않고 16년 동안 선반 위에 묶어 두었다가, 향리로 돌아온 지 3년 만인 서기 1247년 즉 그의 나이 68세일 때에 곤륜(崑崙)의 범(范) 존사(尊師)의 권유로 병든 몸을 지탱하며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이동원은 이 책을 완성하고 불과 4년 뒤인 서기 1251년에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동원의 이름은 고(?)이고 자(字_는 명지(明之)이니, 자호(自號)로 삼은 동원노인(東垣老人)의 동원(東垣)은 그의 고향인 진정(眞定)의 옛 이름이다.
이동원 하면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과 내상병(內傷病)이 머리에 떠오르겠지만, 『원사(元史)』에 따르면 이동원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내상(內傷)보다 상한(傷寒)과 옹저(癰疽)와 안목(眼目)의 병으로 더 유명하였다고 한다. 원호문(元好問)의 『유산집(遺山集)』에 보이는 〈상한회요인(傷寒會要引)〉에 따르면 금나라가 멸망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1238년 즉 그의 나이가 59세일 때에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30여만 자나 되는 상한(傷寒)에 관한 방대한 책을 저술하여 아들인 집중(執中)을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던 원호문(元好問)에게 보내서 서문을 요청하여 간행하였다고 하니, 이동원 자신도 외감(外感)과 관련된 저술인 『상한회요(傷寒會要)』라는 책에 더 큰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